6화 _ 가족

by 빈자루

승광의 말을 들은 취객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아래를 향하였다. 그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조용히 주막을 빠져나갈 때 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승광은 잔에 있던 곡주를 모두 비운 후 주모에게 삯을 치르고 주막을 나왔다. 대낮부터 독주를 다섯동이나 마셨음에도 그의 어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걸음이 살구나무 밭을 지나 언덕 위의 오온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오온, 나 왔네. 승광일세."

승광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사숙님, 오셨습니까."

뜰 한켠 오래된 살구나무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장수가 칼 끝을 내리고 승광을 맞이했다.

"이놈아, 사숙은 무슨. 내가 땡중이지, 사숙이냐? 그놈의 존칭은 집어치우고 그냥 ‘이놈’이라 해라. ‘이자’라 해도 좋고.”

승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나저나 오온 이 늙은이는 요새도 제자들한테 칼을 안 보여주는 게냐? 호흡도 내려가지 않은 놈이 칼 소리만 요란하구나."

승광이 장수의 배꼽 아래와 명치를 두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여기다. 여기가 아니고. 호흡이 너무 올라가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어깨 들뜨지 말고."

장수가 호흡을 내리며 공력을 순환시켰다. 명치끝에 눌려있던 기맥이 풀리며 내력이 자연스레 몸 안을 돌았다.

"다음에 봤을 때도 호흡이 이 모양이면 저 살구나무 가지에 달아 놓고 호흡이 내려올 때까지 걸어 두겠다."

승광이 살구나무 가지를 올려보며 말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줄기는 땅에서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젊은 남자의 허벅지보다 굵은 가지는 장정 서넛이 거뜬히 매달릴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가지 끝마다 어린 소녀 같은 연분홍 꽃들이 하늘 가득 피어 있었다.

"예. 사숙."

장수가 짧게 대답했다.

"대답은 잘하는 놈이 고집은 세구나. 이놈아 사숙이 아니라 땡중이래도."

승광이 쾌활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아저씨 오셨어요?"

안채 문이 열리며 명월이 달려와 승광에게 안겼다. 흑단 같은 긴 머리와 반짝이는 눈동자. 선명한 눈매와 하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명월의 머리카락에 살구꽃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여린 몸을 감싸고 있는 소복이 봄바람에 일렁거렸다.

"오 명월이 왔느냐? 어째 미모가 점점 더 살구를 닮아 가는구나."

명월이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쥐며 말했다.

"으 술 냄새. 아저씨 또 술 마셨어요? 무슨 중이 만날 술동이를 끼고 살아요? 아저씨 이러다 지옥가요."

"요 녀석아 중이 술 마시지 말라는 건 부처님 말씀엔 없다. 그건 다 부처의 힘을 등에 업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지어낸 거짓이야."

"그래두 술을 많이 마시란 소린 안 하셨겠죠. 아저씬 부처님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잖아요."

승광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네가 나를 잘 아는구나. 명이와 평이는 어디 있느냐? 네 오라비들."

"몰라요. 명이 오라버니는 옆 고을에 검술 교관으로 초빙되어 갔고 평이 오라버니는 몇 달째 광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바보 멍충이들 같으니라구."

명월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말갛게 달아 오른 하얀 뺨. 조그만 얼굴에 그렁그렁한 눈. 화가 난 듯 일그러진 입술까지 그녀의 자태는 꽃봉오리와 닮아있었다.

"조평 형님은 폐관수련 중이십니다. 지금 나오긴 힘드실 거예요."

장수가 말했다.

"이 바부야 왜 니가 말을 해. 어서 가서 평이 오라버니나 불러와. 광 안에서 죽어있으면 어떡하구."

"평이 형님은 지금 못 나오신단 말이야. 나한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 수련에 방해된다구."

장수가 눈을 깜빡이며 명월의 말을 받았다.

"으휴 저 바보 멍텅구리."

명월이 씩씩거리며 문을 나서서는 살구밭 쪽으로 사라졌다. 눈처럼 하얀 저고리 자락이 바람이 불 때마다 풀잎처럼 일렁거렸다.

"허 녀석. 아직 살구꽃이 되기는 멀은 모양이구나. 지 아비랑 다르게 성격이 괄괄해. 저 놈은 사내야 사내."

승광이 말하였다. 장수는 명월이 사라진 건너편을 아련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아. 뭘 히죽이고 서 있는 게냐? 저런 사내놈이 뭐가 좋다고. 향기로운 꽃일수록 독한 벌이 달라붙어 있는 법이다."

"사숙 어르신. 그래도 저는 명월이가 좋단 말입니다. 명월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놈 입 벌어진 것 보게. 앞에선 입도 뻥끗 못하는 놈이 늙은 중 앞에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요놈."

승광의 장지팡이가 허공을 가르며 장수의 머리 위를 향하였다. 명월이 사라진 곳을 보던 장수의 두 발이 순간 방향을 틀어 승광의 지팡이를 아래로 흘렸다.

"요놈 보법에서 힘 빼는 법을 터득하였구나. 허면 이건 어쩌겠느냐?"

떨어졌던 승광의 지팡이가 마치 제비가 물을 훔치듯 아래에서 방향을 틀어 장수의 턱을 노리며 올라왔다.

"명월아."

승광이 외쳤다.

지팡이가 장수의 턱 밑에서 부지불식간에 멈춰 섰다.

"이놈 상대는 눈앞에 있는데 마음은 살구밭에 가 있구나."

"너무 하십니다 사숙. 거짓말이라니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집착하지 말거라. 좋았을 때는 딱 아까까지였다."

승광이 웃으며 지팡이를 땅에 꽂듯 세웠다. 장수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듣는 것이 어찌 이치에 어긋난 일이란 말입니까?"

콩.

승광이 장수의 머리통을 지팡이로 가볍게 내리쳤다.

"이놈 그새 호흡이 또 올라왔네. 계속 이러면 정말 살구나무에 매달아 놓을 것이야."

"아프다구요 사숙. 아파요."

장수가 머리통을 만지며 볼맨 소리를 냈다.

이때 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방글방글 웃으며 이들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장수의 스승이자 승광의 오랜 벗. 오온이었다.






https://youtu.be/WUEupAGhEgc


대문사진으로 가져오는 그림들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베가본드라는 만화책의 일러스트입니다. 베가본드는 왜 완결이 나지 않을까요? 여주인공인 오츠의 그림이 너무 예뻐서 가져왔습니다. 이노우에님도 슬램덩크를 연재할 때 처음엔 학원물로 시작하셨다고 해요. 그땐 일본만화의 대세가 학원물이여서요. 이노우에님의 그림은 정말 ㅎㄷㄷ. 저렇게 그림을 그리고 싶으셨는데 만화책 한 컷 한 컷은 어떻게 넘어가면서 그리셨는지 모르겠네요. 베가본드는 아무래도 완결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사사키 코지로우와 미야모토 무사시의 마지막 대결 장면만 남은 것 같은데, 무사시가 마을에서 농작물을 키우는 장면에서 이미 고점을 찍어버려서 마지막 장면은 쉽게 그리지 못하실 것 같아요. 유튜브로 올리는 음성 파일은 노트북 lm이라는 사이트에서 텍스트를 넣으면 자동으로 생성되는 대화입니다. 저보다도 요약을 잘 해줘서 글 쓰고 나서 들으면 도움도 되고 재미있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네요.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마지막 날은 마지막 날대로 또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죠. 어째. 새해 첫날보다는 마지막 날의 아늑함이 저는 더 좋네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올 한해도 다들 엄청나게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일단 우선 다 건강하셔요. 건강이 최고입니당~~ 감사합니당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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