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햇살이 기울자, 살구꽃 그림자가 뜰에 덮였다.
승광이 나뭇가지에 걸린 술병을 떼어내더니, 독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오온은 여전히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막대사탕을 핥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정말로 반로환동을 이루었어."
승광이 입을 떼었다.
"..."
역시나 오온은 박자를 맞추지 못하였다.
"이 팽팽한 피부 좀 보게. 자네 정말 축하하네. 드디어 성취를 이루었군."
"..."
윤기나는 머리칼이 오온의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헌데, 요새 무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어디에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무림맹과 사도연합이 서로 세를 불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어."
"..."
"아니, 놈들이 찾아왔을 때 왜 일갈을 해 혼구녕들을 내주지 않았는가? 자네도 참, 자넨 너무 우유부단한 게 탈이야."
오온이 사탕을 혀로 핥았다.
"그나저나 큰일이구만. 무림의 민심이 차가워지고 있어. 최근 서역의 사린국에서 자장투스트라라는 자가 창시한 종교가 무림에 빠르게 번지고 있는 모양이야. 강자지존이라는 논리가 양민들에게 먹혀들고 있어. 양민들도 정파와 사파의 세치 혓바닥 싸움에 이력이 난 게지..."
오온이 사탕을 혀로 핥다가 승광의 말에 멈칫했다.
"대체, 의가 먼저니, 협이 먼저니. 이게 무슨 시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헛된 놈들. 헛된 놈들의 헛된 망상에 무림이 놀아나고 있어."
오온이 이번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명이와 평이는 아주 잘 자라주었네. 그때 그 전쟁터에서 죽은 어미 품에 안긴 녀석들을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자네가 나 대신 맡아 잘 키워주었어. 고맙네 그려."
"..."
"하긴, 명이 녀석과 평이 녀석 둘 다 제 어미나 아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게 좋을 게야... 사이가 돈독한 녀석들인데,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녀석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겠는가... 허이고, 그저 이 늙은 중놈은 그놈들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오온이 승광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자넨 왜 말이 없는가?"
오온이 사탕을 핥으며 승광의 눈길을 피했다. 말은 없었지만 뭔가를 얘기하려다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 나 지금 운다고 속으로 흉보고 있는 겐가? 나 이거 눈물 아닐세. 이거 그냥 눈에서 나온 물이야, 물."
승광이 두 눈가를 슬쩍 훔치고 바쁘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마교라는 녀석들, 교리가 들어온 교역로를 역으로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양민들이 놈들 손에 놀아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이 우라질 놈의 무림맹주와 사도련주 같으니라고. 이럴 때 칠현 선생이라도 계셨어야 하는 건데..."
"..."
오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천천히 입을 떼었다.
"뭔가? 뭐라도 방책이 떠오른 겐가?"
"...으흠..."
"뭔가? 뭔가? 어서 말해보게."
"...음..."
오온이 양손을 올려 문득 탱탱해진 볼을 만지며 승광을 살짝 바라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자랑과는 달리 오온의 볼은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뭐야? 자네 지금 자기 얼굴 탱탱해졌다며 자랑하는 겐가? 이 늙은 중놈은 쭈글쭈글 할아범인데?"
오온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승광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뭐야, 내 말 맞는거지? 지금 나 부러워하라고 자랑하는 거 맞지?"
오온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번져있었다.
"이 음흉한 영감탱이가 진짜. 지금 무림의 앞날이 사방천지 캄캄한데, 자네 지금 나한테 피부 자랑하는 겐가?"
오온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음흉한 영감탱이야. 너 그거 자랑하려고 반로환동했냐?"
오온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안 그래도 집도 없고 절도 없이 혼자 떠도느라 힘들구만, 벗이라고 찾아왔더니 니가 지금 날 놀리냐?"
승광이 벌겋게 열이 올라 오온에게 소리쳤다.
"아이구, 내 팔자야. 장수야, 명월아 이리 와봐라. 내가 그때 칠현 선생님 화두 받고 거기에 꽂혀서 머리만 깎지 않았어도... 아이고, 사부님! 아이고, 내 팔자야!"
오온이 꺼이꺼이 쭈그려 무릎팍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는 승광을 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뭔가? 자네? 뭔가?"
승광이 눈에 불을 켜고 오온에게 물었다.
오온의 손가락이 맨들맨들한 승광의 머리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곤 천천히 자신의 길고 탄력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뭐야? 지금 나 머리 안 깎았어도 어차피 대머리 됐을 거라고 놀리는 겐가?"
승광이 벌떡 일어섰다.
"야 이 음흉한 영감탱이야! 니가 지금 무림의 오십만 탈모인들을 건드리냐? 다른 건 다 참아도 내가 이거는 못 참는다!"
오온이 그런 승광을 보고 슬쩍 자리를 물러났다.
승광이 칠현 선생에게 회초리를 맞을 때 뒤에서 웃고 있던 오온의 얼굴, 승광이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머리를 깎던 날 어여쁜 꾸냥을 데려와 자랑하던 오온의 말투, 그간 억눌렸던 승광의 기억들이 파편이 되어 승광의 머릿속에서 끄집어져 나왔다.
"이 음흉한 영감탱이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내 어릴 적 너와 수학할 때부터 진작 니 본성을 알아봤다. 이 변태 영감탱이! 너 죽고 나 죽자!"
승광이 펄펄 뛰며 오온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오온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승광을 보며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
해가 지고, 살구꽃 그림자마저 서서히 사라져 갈 무렵, 두 늙은 벗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오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래도, 와줘서 고맙네."
승광은 괜히 술병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와야지."
승광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던졌다.
그 말을 듣고 오온이 홍조 일은 두 뺨을 다시 슬쩍 매만졌다.
"이 영감탱이가... 2차전 가자는 말이지?"
승광의 눈에 다시 불이 켜졌다.
오온이 손을 뺨에서 거두고 품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자, 승광이 말없이 사탕을 받아 들었다.
저무는 햇살 속에서 두 늙은 벗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사탕을 핥았다.
그들의 뒷모습이 무림촌 앞마당에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둘이 만든 그림자는 해가 져도, 밤이 깊어도,
오래도록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