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9화

by 빈자루

본디 무림은 하나였다.


오온과 승광의 스승 칠현(七玄), 초야의 왕이라 불리던 녹림왕 패천(覇天), 검의 극에 오른 검존 현제양(玄霽陽), 사도의 기치를 처음으로 높인 혈염마 적목한(赤目漢), 그리고 밤꽃처럼 피어올랐던 야화검후 화영(花影)——그들이 생존하고 호흡하던 시절, 무림에는 정과 사의 구분이 없었다.

그들은 때로는 협객이었고, 때로는 도적이었으며, 때로는 구세의 성인이자 학살의 괴물이기도 했다. 강호는 다만 힘과 의지, 그리고 검 하나로 서로를 인정하던 시절이었다.


곧은 산맥과 좁은 평야로 이루어진 중원 땅은 본디 인간이 살기엔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이었다. 혹한의 산세와 들끓는 역병, 짐승과 도적, 조정의 착취—그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백성들. 무림은 그 속에서 태어났다.

무(武)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자, 인간됨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이들 일 세대의 고수들이 존재했다.


무림을 둘로 나누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언어’였다.

‘협(俠)’과 ‘의(義)’—고작 두 글자에 지나지 않는 이 단어들이, 무림을 가르고 사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협이라 불리었고, 누군가는 의라 불리었다.

처음엔 다들 그것을 믿었다. 협은 곧 강자의 자비였고, 의는 약자를 위한 정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언어는 사람들을 속박하는 굴레가 되었다.

누가 협인가, 누가 의인가. 누가 정이고, 누가 사인가. 검은 점차 말에 물들었고, 진심은 교리에 가려졌다. 그리하여 무림은 둘로 나뉘었다.

누구도 그것이 분열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모두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말이 칼보다 빠르고, 칼이 말보다 무거워진 시대. 그 시대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오온과 승광이 검을 거둔 것은 제2차 정사대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핏물 속에 잔설이 녹고, 검의 그림자가 강호에서 지워지기 시작하던 때. 누군가는 승리했노라 외쳤고, 누군가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대전이 무엇을 지켜냈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젊은 혈기가 왕성했던 오온과 승광은 그날 이후, 더는 칼을 들지 않았다. 누구를 향해서도, 자신을 향해서도.

그들의 침묵은 항거였고, 동시에 체념이었다.

칠현 선생이 남긴 마지막 화두를 가슴에 묻은 채, 그들은 산을 오르고 이름 없던 무림촌으로 흘러들었다.


전쟁터에서 나오는 그들의 가슴팍엔, 갓 생명을 얻어 젖을 달라고 보채는 두 갓난쟁이가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둘은 양명과 조평이었다.

양명은 헤어진 삼베 천 쪼가리에, 조평은 피가 묻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그렇게 무림촌에서 자라게 되었다.


무림촌에서 그들은 세월을 묻었고, 무림은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오온은 산을 일구었고, 승광은 중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누구도 그들의 검을 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속삭이지 않았다.


오온이 현경에 들기 전까지는.



*

"살구(殺狗)래요, 살구(殺狗)래요, 명월이 아버지는 살구(殺狗)래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놀리면 그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먼저 달려드는 것은 늘 명월이었다.


"우리 아부지가 왜 살구야? 우리 아버진 무인이라구! 우리 아부지 검술이 얼마나 훌륭한데!"


"울 엄니가 그러던데? 명월이 아부지는 사내 같지도 않고, 쑥스러움만 많이 타서 맨날 말을 걸으면 얼굴이 벌게 진다고. 꼭 살구꽃 맹키로."


스승은 암사내였다. 부끄러움이 소녀처럼 많은 남자. 아무 말 않고 평소 명월을 달래 안아주던 오온의 얼굴이 떠오르며 명월은 주먹을 꼭 쥐고 파르르 떨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옹달 같은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애써 울음을 삼켰다.


"왜에? 나를 또 칠라구? 또 쳐봐, 또 쳐봐? 울 엄니한테 일르면 너 느네 아부지한테 야단맞을걸?"


"우리 아부진 나 안 혼내! 우리 아부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신다고!"


작은 여자 아이의 어깨가 버들잎 같이 떨리고 있었다. 명월은 여전히 주먹을 꼭 쥔 채,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앞에 서 있는 사내아이를 흘겨보았다. 그 아이가 무서운 게 아니었는데도, 자꾸만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런 명월을 보고 앞의 아이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자, 뒤의 아이들도 덩달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살구래요, 살구래요, 명월이 아버지는 살구래요. 월월. 너네 아부지는 개 밖에 못 잡으시냐? 월월. 우리 동네 개들이 그래서 너네 아부지만 보면 그렇게 짖나 보다. 월월. 월월."


족제비같이 생긴 녀석이 뚱보의 앞으로 기어 나와 개가 짖는 시늉을 했다. 명월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뚱보가 그 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족제비와 명월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족제비와 뚱보 주위를 빙 두른 동네 아이들의 입에서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아. 맞아. 월월. 아이고 무서워라. 도망가야겠다."


명월이 끝내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장수가 나뭇짐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달려와 뚱보의 얼굴을 이마로 들이받았다.


"악!"


뚱보가 쓰러지며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쥐어 싼 코에서 빨간 피가 흥건히 흘러 턱밑을 적셨다.


"엄마, 나, 피나... 엄마... 나, 피..."


뚱보가 울면서 소리쳤다.


"너네들 지금 뭐라고 했어? 너네가 명월이 울렸어?"


장수가 주위를 두른 사내아이들을 보며 소리쳤다. 아이들이 짐짓 놀러더니 뒤로 물러나 조용해졌다.


"너네 명월이 한 번만 더 울렸다가는, 내가 가만 안 둔다!"


뚱보가 분에 못 이겨 일어나 장수에게 달려들었다. 장수가 가볍게 뚱보를 피하자 열이 받친 뚱보가 소리쳤다.


"야! 이장수! 너 새끼. 울 아부지한테 너 다 이를 거야. 너네 집 나무 이제 사주지 말라고! 너 이제 집에 가면 니네 아부지한테 죽었다!"


장수가 속으론 놀랐지만 짐짓 태연한 척 가슴을 펴고 뚱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무가 뭐? 그깟 나무가 대수야? 안 사주면 고만이야. 너 한 번만 더 명월이 울려봐. 그땐 내가."


장수가 가슴을 세게 치며 말을 이었다.


"가만 안 둬!"


뚱보가 눈꼬리를 내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뭉쳐있던 아이들에게서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또라이 진짜..."


"뭐야, 지가 명월이 남편이야 뭐야."


또 다른 아이가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둘이 결혼도 하고, 뭐, 그렇고 그런가 보다."


장수가 가슴을 세워 올리고 아이들 앞으로 다가갔다.


"너네들 뭐? 더 할 말 남았어?"


족제비가 뒤에서 빠르게 말을 받았다.


"너 뭔데 맨날 명월이 일에 끼어드냐? 너 명월이 좋아하냐?"


장수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 명월이 좋아한다. 나 명월이랑 결혼할 거다."


장수의 태도에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치. 잘 난 척은 되게 하네."


"야, 됐다. 가자. 쟤네랑 엮이면 우리만 손해다. 야, 가자."


아이들이 빠지자 뚱보가 씩씩거리며 장수를 노려보다가 뒷걸음질 치며 아이들을 따라갔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밭 쪽으로 사라졌다. 뚱보가 소리쳤다.


"너 반드시 내가 복수한다!"


장수는 그쪽을 보고 노려보다가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급하게 명월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물었다.


- 괜찮아?


주저앉은 명월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이 울음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명월이 장수의 너른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야, 이 바부야, 내가 왜 너한테 시집가?"


장수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명월을 달래며 말했다.


"아, 그거 그냥 한 말이야. 애들이 너 못 괴롭히게 하려고."


명월이 장수의 가슴을 더욱 세게 때리며 재차 말했다.


"이 바부야, 내가 뭐 물건이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게? 내가 왜 너한테 시집가냐고?"


더욱 거세지는 명월의 투정에 장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명월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왜 말을 못 해? 이 바부야, 왜 말을 못 하냐고? 너가 아까 뭐라 그랬어?"


명월의 작은 주먹이 더욱 세게 장수의 가슴을 쳤다. 햇볕을 받아 까무잡잡한 피부에 또렷한 눈매.

곧게 내려온 코에 앙다문 작은 입술.

눈물을 담아 더욱 선명해진 명월의 눈동자를 장수가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피하자 명월이 더욱 세게 장수의 가슴을 쳤다.


"이 바부야! 니가 아까 뭐라 그랬냐고?"


장수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끔벅끔벅 눈만 감았다 떴다.


명월이 울면서 소리쳤다.


"이 바부 멍충이. 나 너랑 결혼 안 해!"


장수가 명월의 손을 잡았다.


"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잡아끄는 장수의 이마에서 피가 찔끔 흐르고 있었다.


"어? 너 피나!"


명월이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장수의 이마를 보았다. 짧은 머리카락과 반듯한 이마가 만나는 사이에 작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수가 빠르게 땀이난 이마를 피와 함께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아, 이거 아까 나무하다 긁혀서 그래. 별거 아니야."


"야. 너 피나..."


명월의 표정이 금세 심각해져서 장수의 이마를 살폈다.


"아냐, 괜찮아. 물로 씻으면 금방 나아."


장수가 고개를 돌렸다.


"어떡해..."


명월의 얼굴이 이번엔 정말로 눈물범벅이 되었다.


"어떡해... 나 때문에..."


"괜찮다니까. 그냥 닦으면 없어져."


"으휴. 바부 멍충이. 진짜 사람 속을 태우고 죽겠네, 너는 진짜."


명월이 속이 상해 죽겠다는 듯 말하고 장수의 이마를 쓸어 만졌다. 맑은 땀이 반듯한 장수의 이마 옆으로 흘렀다. 장수가 명월의 눈을 피하였다. 명월이 깃 아래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손포를 꺼내 장수의 다친 곳을 조심스럽게 눌러주었다. 명월의 작은 손이 닿자 피는 이내 멈추었다.


"괜찮다니까."


장수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으휴. 이 바보야. 뭐가 괜찮아. 이렇게 피가 철철 나는구만. 얼른 집에 가자. 내가 약 발라 줄게."


주저앉아 있던 명월이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아."


발을 디디려던 명월이 바로 서지 못하고 한쪽 발을 접었다.


"어? 너 왜 그래?"


고개를 돌리고 움츠려 있던 장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명월의 손을 잡았다.


"아까 삐었나 봐. 아씨..."


장수가 허리를 굽히고 명월의 발목을 살폈다. 하얀 종아리 밑의 복숭아 뼈 부위가 살짝 부풀어 있었다.


"안 되겠다. 너 이리 업혀."


장수가 단호하게 말하며 구 부정히 서 있는 명월의 앞에 등을 가져다 대었다. 낡은 옷이었지만, 장수의 냄새가 배어 있는 너른 등이었다.


"야, 됐어! 애들이 보고 또 놀리면 어쩌려고?"


명월이 장수의 등을 치며 말했다.


"아, 얼른 업히라니까."


장수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명월이 선뜻 장수의 등에 안기지 못하자, 장수가 허리를 굽혀 명월을 업어 올렸다. 명월이 장수의 등에 안겼다.


너른 등에서 장수의 냄새가 났다. 명월은 장수의 등에 살며시 뺨을 기대었다.


명월의 눈에선 눈물이 그쳐 있었다. 한껏 눈물을 흘린 덕인지 명월의 눈가에는 어느새 고운 연분홍 빛이 돌고 있었다. 한동안 장수의 등에 안겨 가던 명월이 장수에게 물었다.


"너, 아까 애들 앞에서 거짓말한 거야?"


장수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신경질이 난 명월이 장수의 등을 찰싹 때리며 장수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 왜 또 대답이 없어?"


묵묵히 걷고 있던 장수에게서 드디어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아니,라는 말에 명월의 마음이 봄바람에 민들레 홀씨 날리듯이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너 그럼 정말 나한테 장가 올 거야?"


다시 장수가 대답이 없었다.


"너 나한테 정말 장가 올 거냐구?"


명월이 다시 애가 타서 물었다.


장수가 멈춰 서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연히 가야지. 내가 니 신랑인데."


명월은 장수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장수와 명월, 두 사람은 오래오래 그렇게 그 길을 따라 죽 걸어갔다. 두 사람 모두,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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