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

10화

by 빈자루

*

"건곤대나이 심(乾坤大那異 心)"


서재에 꿇어앉은 장수가 말하였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장수가 호흡을 가다듬고 속으로 말하였다.


(건곤대나이 심)


역시 반응이 없었다. 큰일이었다. 스승께서 전수해 주신 심법을 활용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건곤대나이 심!!)


애타게 심법을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는 또 한 줄도 못 쓰고 하루가 지나가게 생겼다.

장수는 책상 앞에 엎드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책상 위에는 고서와 노트북, 찻잔과 비급 초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눈앞의 빈 화면에는 커서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스승님...)


장수가 절망하며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나 운동 갔다 올게!'


장수가 대꾸도 없자 명월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운동 갔다 온다고!"


명월이 소리쳤다.


"아, 내가 나 서재에 있을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왜 자꾸 그래..."


장수가 칭얼거리는 투로 명월에게 탓을 했다. 명월이 가소롭다는 듯이 장수를 보며 말했다.


"글이 안 써지는 게 나 때문이야? 자기 때문이지? 왜 자꾸 나한테 승질이야?"


"아, 집중했을 때 누가 방해하면 흐름이 깨진다고..."


명월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흐름은 원래 깨지라고 있는 거야."


"... 뭐?"


장수가 고개를 들었다. 명월은 문지방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뒤로 묶은 짧은 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예전보다 조금 더 말라 보이는 몸. 허리는 반듯했고,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진짜 흐름 있는 놈은, 깨져도 다시 잇는다고."


그 말에 장수는 입을 다물었다.


"됐고, 나 갔다 올게. 집에만 있지 말고 소소 데리고 나가서 좀 놀아줘."


"... 알았어... 다녀와..."


장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여튼, 팔자 좋아요."


명월이 나가면서 내뱉었다.


"휴..."


장수가 한숨을 길게 쉬고, 일어나 방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차분히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건곤대심나이 심...)


하나, 둘, 셋, 넷...


하늘과 땅이 커다란 뜻을 찾고...


하나, 둘, 셋, 넷...


마침내 또 다른 무엇을 만나네...


하나, 둘, 셋, 넷...


이번엔 혈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세로 심법을 몇 주천 돌리면 글을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 아빠!


소소였다.


노란 잠옷을 입은 아이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

품에 안고 있으면 안은 사람의 심장이 따뜻해지는 아이.

동그란 눈을 보고 있으면 건드려서 울리고 싶어지는 아이.


소소의 삐죽빼죽한 머리카락이 아이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소소가 장수의 무릎에 올라앉으며 물었다.


"아빠 뭐 해?"


소소가 장수의 턱에 난 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장수가 소소의 손에서 얼굴을 멀찍이 떼며 말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그냥 쉬고 있었어."


아이에게 건곤대나이 과 비급에 대해 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하지만 아이는,


"왜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소소가 동그란 눈으로 장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


"왜 그냥 쉬어?"


"아아... 아빠가 왜 그냥 쉬냐는 말이지? 음... 그러니까, 아빠는, 음... 그냥 쉬고 싶어서 쉬고 있는 거야... 알겠지?"


"그러니까 왜 쉬는데?"


"어?"


장수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소소가 장수를 빤히 쳐다봤다.


"음... 그러니까 소소는 아빠가 왜 쉬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이구나... 그렇지 소소야?"


아이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소소야, 엄마는 어디 갔어? 아, 운동 갔구나."


장수는 무릎 위에 주저앉은 소소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직 어린아이이기는 했지만 몇 년 새 소소의 무게가 늘어, 이젠 오랜 시간 무릎 위에 앉혀 놓기에는 장수의 다리가 저렸다.


방책이 떠오른 듯 장수가 아이에게 말했다.


"응... 그러니까 소소야. 아빠는 왜 쉬고 있었을까? 소소가 얘기해 볼래?"


소소가 통통한 볼살을 살짝 오므린 채,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다행이네...)


장수가 안도한 순간 소소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나랑 놀이터 가서 괴물 놀이하려고?"


소소가 기뻐하며 장수에게 되물었다. 소소의 맑은 눈이 장수를 보며 반짝였다.


"응... 그래... 나가자... 소소야..."


소소가 장수의 무릎에서 펄쩍 뛰며 일어났다.


"가자. 가자. 아빠. 가자. 가자. 나가자. 아빠."


책상 위에는 노트북 속의 커서가 빈 화면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응. 나가자. 소소야."


장수의 공력은 분산되어 사라졌다. 장수가 축 늘어진 채 소소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비급에만 팔려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장수가 속으로 되뇌었다.


장수와 멀찍이 떨어져 앉은 벤치 저편에선 엄마들이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추리닝 차림의 장수가 홀로 앉아 무림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형...)


조평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럴 때 사형만 곁에 계셨더라면...)


소소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 순간 장수는 소소의 손에 이끌려, 괴물이 된 채 놀이터를 신나게 뛰고 있었다.


(조평 형님...)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사나이의 안면 위를 지럽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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