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와 명월

7화

by 빈자루

"오온, 나 왔네. 승광일세."


승광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사숙님, 오셨습니까."


뜰 한켠, 오래된 살구나무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장수가 칼 끝을 내리고 승광을 맞이했다.


"이놈아, 사숙은 무슨. 내가 땡중이지, 사숙이냐? 그놈의 존칭은 집어치우고 그냥 ‘이놈’이라 해라, ‘이자’라 해도 좋고.”


승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나저나, 오온, 이 늙은이는 요새도 제자들한테 칼맛을 안 보여주는 게냐? 호흡도 내려오지 않은 놈이 칼 소리만 요란하구나."


승광이 장수의 배꼽 아래와 명치를 두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여기다. 여기가 아니고. 너는 호흡이 너무 올라가 있어."


"네, 사숙. 명심하겠습니다."


"어깨 들뜨지 말고."


장수가 호흡을 내려 공력을 순환시켰다. 명치끝에 눌려있던 기맥이 풀리면서 내력이 자연스럽게 몸 안을 돌기 시작했다.


"다음에 봤을 때도 호흡이 이 모양이면, 저 살구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호흡이 내려올 때까지 걸어 두겠다."


승광이 살구나무 가지를 올려보며 말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의 줄기는 땅에서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젊은 남자의 허벅지보다 굵은 가지는, 장정 서넛쯤은 거뜬히 매달릴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그 끝끝마다, 어린 소녀의 붉은 뺨을 닮은 연분홍 꽃잎들이 하늘 가득 피어 있었다.


"예. 사숙."


장수가 짧게 답하였다.


"대답은 잘하는 놈이, 지나치게 고집이 세구나! 이놈아, 사숙이 아니고 땡중이래도!"


승광이 쾌활하게 웃었다.


"아저씨, 오셨어요?"


명월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오며 승광의 곁으로 다가왔다. 흑단 같이 검은 긴 머리, 햇볕에 반사된 까만 눈동자, 그 바깥의 선명한 눈매와 하얀 얼굴이 눈에 띄었다. 명월의 머리카락에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막 뛰쳐나온 듯, 꽃잎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녀의 여리여리한 허리가 반듯하고 곧게 위로 펴져 있었다.


"오, 명월이 왔느냐? 어째 미모가 점점 더 저 살구꽃을 닮아 가는구나."


명월이 하얀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쥐며 말했다.


"으 술 냄새. 아저씨! 또 술 마셨어요? 무슨 중이 맨날 술동이를 끼고 살아요? 아저씨 이러다 지옥가요!"


"요 녀석아! 중이 술 마시지 말라는 건, 부처님 말씀엔 없다. 그건 다 부처의 힘을 등에 업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지어낸 소리야."


"그래두 술을 많이 마시란 소린 안 하셨겠죠. 아저씬 부처님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잖아요!"


승광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네가 나를 잘 아는구나. 허허. 명이와 평이는 어디 있느냐? 네 오라비들."


"몰라요. 명이 오라버니는 화산에 검술 교관으로 초청되어 갔고, 평이 오라버니는 몇 달째 광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바보 멍충이들 같으니라구!"


명월이 뾰로통한 말투로 말했다. 명월의 하얀 뺨이 말갛게 달아 올라있었다.


조그마한 얼굴에 그렁그렁한 눈, 화난 듯 일그러진 입술까지도 꽃봉오리를 닮아있었다.


"조평 형님은 폐관수련 중이십니다. 지금 나오시긴 힘들 거에요."


장수가 말하였다.


"이 바부야! 왜 니가 말을 해! 얼른 가서 평이 오라버니나 불러와! 광 안에서 이미 죽어있으면 어떡하려구!"


"평이 형님은 지금 못 나오신단 말이야. 나한테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 수련에 방해된다고."


장수가 눈을 깜빡이며 명월의 말을 받아쳤다.


"으휴. 저 바보 멍텅구리!"


명월이 씩씩거리며 언덕 아래 살구밭 쪽으로 사라졌다. 눈처럼 하얀 저고리에 옥빛 치맛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치맛단이 풀잎처럼 살짝살짝 일렁였다.


"허. 녀석. 아직 살구꽃이 되기는 멀은 모양이구나. 지 아비랑 다르게 성정이 괄괄해. 저 놈은 사내야, 사내."


승광이 말하였다. 장수는 명월이 사라진 사립문 건너편을 아련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아. 뭘 히죽이고 서 있는 게냐? 저런 사내놈이 뭐가 좋다고. 향기로운 꽃일수록 독한 벌이 달라붙어 있는게다. 네 놈은 그걸 모를 거다."


"사숙 어르신. 그래도 저는 쟤가 좋단 말입니다. 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이놈, 입 벌어진 것 보게. 저 애 앞에선 입도 뻥끗 못하는 놈이 늙은 중 앞에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요놈!"


승광의 장지팡이가 순간 허공을 가르며 장수의 머리 위를 향하였다. 명월이 사라진 곳을 보며 히죽이 던 장수의 두 발이 순간 방향을 틀며 승광의 지팡이를 아래로 흘려보냈다.


"요놈. 보법에서 힘을 빼는 법을 터득하였구나. 허면 이건 어쩌겠느냐?"


떨어지던 승광의 지팡이는, 마치 제비가 물을 훔치듯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장수의 턱 밑을 노렸다.


"명월아!"


승광이 외쳤다.


지팡이가 장수의 턱 밑에서 부지불식간 멈춰 섰다.


"이놈, 상대는 눈앞에 있는데, 마음은 살구밭에 가 있구나!"


"사숙. 너무 하십니다. 거짓말이라니요!"


"보이고 들리는 것에 집착하지 말거라. 좋았을 때는, 딱 아까까지였다."


승광이 껄껄 웃으며 지팡이를 툭, 땅에 꽂듯 바로 세웠다. 장수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랑도, 중생의 것이라구요!"


콩. 지팡이가장수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이놈. 그새 호흡이 또 올라왔네. 계속 이러면 정말 살구나무에 매달아 놓을 것이야."


"아프다구요! 사숙! 아파요!"



그때, 조막만 한 손에 막대 사탕을 쥔 채, 방글방글 웃으며 쪼그려 앉아 이를 지켜보던 아이가 있었으니,


그는 명월의 생부이자 장수의 스승인 오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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