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붕.
식구들 곁에 누웠던 장수가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가 호롱불 앞에서 삯 바느질을 하느라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깨어났니?"
어머니가 장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예... 목이 타서요..."
장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동생들은 한데 엉켜 위아래를 바꾼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장수는 조용히 창호지 문을 밀고 쪽마루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움츠린 어깨의 장수를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쫓았다.
붕.
그날 이후로 붉은 얼굴의 목단에서 났던 소리가 장수의 귀에서 잊히지 않고 있었다.
장수가 마당으로 나와 지겟대를 손에 쥐었다. 붉은 얼굴이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듯했다.
부웅.
장수의 지겟대가 허공을 갈랐다.
(이 소리가 아닌데...)
다시 한번 지겟대의 끝을 쥐고 하늘을 갈랐다. 팔의 상박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뻐근하였다.
부웅.
(이게 아니야...)
애송이.
붉은 얼굴의 한 마디가 다시 장수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두려움과 공포—아니, ‘안전하지 못하다’는 막연한 감각이 장수의 뇌리를 스쳤다. 그런 감각이 들수록 장수는 더욱 미친 듯이 지겟대를 휘둘렀다. 그럴수록 장수의 칼은 더욱 거칠고 둔탁해졌다.
*
"또 왔느냐?"
이번엔 장수가 명월을 찾지 않고 곧장 조평과 약속했던 살구나무 아래로 향하였다. 조평이 예의 그 웃음을 지으며 장수를 맞이하였다.
"호흡이 많이 올라와 있구나. 무슨 일이지?"
조평이 들썩이는 장수의 어깨를 보곤 물었다.
"소리가 나질 않아요."
"무슨 소리를 말하는 게냐?"
조평의 물음에 장수는 붉은 얼굴과 있었던 일이며, 그의 칼이 장수의 이마 위에서 멈추며 났던 소리,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칼에서는 그때 들었던 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를 말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조평이 입을 열었다.
"흠.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어쩐지 손등 위의 상처가 예사롭지 않았어."
이어 조평이 말했다.
"어디 손바닥을 좀 보자꾸나."
조평의 말에 장수가 물집이 터지고 진물이 나는 손바닥을 조평에게 내밀었다. 장수의 손바닥을 살피던 조평이 말하였다.
"그간 몽둥이 질을 꽤나 한 모양이구나. 허나, 칼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야."
조평이 자신의 손을 장수에게 보여주었다.
종일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손이 장수의 눈길에 닿았다. 조평의 손바닥은 약지 아래와 엄지 두덩 부분을 제외하고는 굳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칼질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소녀의 손처럼 부드러웠고 매끄러웠다.
"칼은 몸의 일부분일 뿐이야. 그것이 손에 쥐여 있든, 쥐여 있지 않든, 칼잡이에게는 매한가지여야 해."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헤아리고 있는 장수에게 조평이 다시 말하였다.
"너는 하루에도 여덟 시간씩 도끼질을 한다고 하질 않았니? 도끼질을 할 때도 이렇듯 손에 물집이 올라오도록 세게 도끼를 쥐느냐?"
장수가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어릴 때부터 도끼질을 하며 이렇게 손바닥이 까지고 흉이 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의 어머니께서 파를 써시고 무를 다듬으실 때도 지금의 너와 같이 온 힘을 다해 칼질을 하시겠니?"
다시 장수가 고개를 저었다.
"자, 이리 와보렴. 이 칼을 쥐어봐."
조평이 역날검을 내밀었다. 장수가 뒤로 주춤하였다.
"상대를 겨눈다는 것은, 너의 목숨과 상대의 목숨을 동일하게 여긴다는 것이야. 너의 목숨을 걸지 않고 어찌 상대의 칼을 받을 수가 있겠니? 그건 한낱 칼 장난에 지나지 않아."
장수의 뇌리에 붉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그날 많은 아이들을 주위에 두르고 있었고 장수에게도 목단이 쥐어져 있었음에도 서슴지 않고 장수에게 다가왔었다. 그의 움직임에도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장수였었다. 장수가 성큼 조평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칼을 건네받았다.
"옳구나. 그렇지. 그렇게 몸의 기운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두 발은 땅을 지그시 누르게 하거라."
조평이 말했다.
"칼은 들고 있지만, 들고 있지 않은 것처럼. 숨을 쉬지만 숨 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하여라."
장수의 손 끝에 칼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것은 무거운 느낌도 가벼운 느낌도 아니었다. 그것은 딱 그만큼, 장수의 어깨에서 손 끝까지 이어지는 팔의 무게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늘상 있어왔지만 없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 너를 항아리라고 생각하거라. 너는 비어있는 항아리다."
장수의 상박과 하박, 어깨와 무릎, 오금과 척추에 힘이 골고루 돌았다. 그 힘은 원래의 장수가 가지고 있던 것이 고루 도는 형세여서 그 힘 역시, 늘 있어 왔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힘이 가운데 단전에 물과 같이 모여들었다.
"자, 앞으로!"
조평이 장수의 허리를 강하게 밀어 장수를 앞으로 밀치었다. 항아리의 중앙 빈 공간에 모였던 물이 출렁하며 앞으로 향하였다. 장수의 몸이 항아리에 담긴 물과 같이 앞으로 크게 향하였다.
"오, 좋구나."
조평이 싱긋 웃으며 장수를 바라보았다. 장수가 얼떨떨해진 표정으로 조평을 마주 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그 눈에 맺힌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어린 소년처럼 장수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