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보자 Nov 13. 2019

나 홀로 여행

여행을 떠나요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여행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했었다. 같이 간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적은 있어도, 시작부터 끝까지 나만이 존재하는 여행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 생각만 해서 그런가 홀로 떠나는 여행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여유로움에 깊숙이 파묻힌 채로 모든 일정을 내가 결정하고, 그 일정을 다시 마음 내키는 대로 변경하면, 왠지 삶을 지배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동안 후쿠시마 대지진 같은 예상치도 못한 심한 인생의 파고를 겪으며  끝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  나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상과 떨어진 곳에서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상처 받은 마음을 추스른 후 돌아오면, 냉정함을 유지한 채 상대방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북해도


그런 이유로 난 별거를 하는 순간부터 여행을 가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북해도였다. 그곳을 나의 힐링 장소로 정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가고자 했다. 


추위를 싫어해서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그 특유의 차분함 때문에 북해도에 가면 마음이 진정되면서, 모든 잡념이 정리될 것 같았다. 


‘꼭 가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아직까지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끊지 못했고, 나의 힐링여행은 매년 초 쓰는 다이어리 새해 계획의 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16년

결혼 생활 끝. 별거가 시작되었고, 어떤 이의 패악질 덕분에 난생처음 겪는 상황들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2017년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다른 의미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재결합을 생각했었다(아마도 나는 호구인가 보다). 


아이들과 떨어져서 사는 생활이 힘들어 그런 고민을 했고, 다시 시작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다행스럽게도 착각의 늪에 빠졌던 시간은 짧았고, 사람은 고쳐 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2018년

올해는 꼭 가리라 다짐을 하고 연말에 사용할 휴가를 8일 정도 남겨두었다. 


그러나 고난 끝에 고난이 온다는 말을 몸소 입증하듯이 허리가 부러졌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경을 다치지 않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도치 않게 불행 중 다행이라는 명제도 입증했다-. 수술과 입원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휴가는 그렇게 사라졌다.


2019년

길고 길었던 이혼 소송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했던 나에게 주는 선물로서 올해는 북해도에서 킹크랩을 꼭 먹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여행을 막았다. 주변 사람도 아닌, 실제로 본 적도 없고, 본다한들 말도 안 통하는 아베라는 남자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애정해마지 않았던 아사히, 삿포로 맥주와 절교하며 나름 ‘NO JAPAN’ 운동에 동참한 나로서는, 북해도 여행으로 그 간의 노력을 공허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경주월드 드라겐


그리하여 내가 대안으로 찾은 곳은 경주였다. 


수학여행의 대명사, 천년고도 경주. 이 곳을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 경주월드라는 곳의 존재였다. 


드라겐, 파에톤처럼 심장의 펌프질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놀이기구들이 있는, 가성비 최고의 테마파크로 유명한 곳이다. 친구랑 연인이랑 가는 놀이공원에 나는 혼자 가서 미친 존재감을 뽐내며 스릴을 만끽하고 싶다.


이번 여행은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면서도, 처음으로 아무런 계획 없이 가는 여행이다(경주월드 때문에 목적지를 경주로 정했을 뿐, 다른 계획은 없다). 


여행을 떠날 때 ‘이 곳이 핫 플레이스야’ , ‘어머, 여긴 꼭 먹어봐야 해’ 등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떠났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면 싶으면 움직이고,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쉴 생각이다.


휴가 날짜를 지난주에 급하게 정했고, 이번 주에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올해는 오랜만에 수능 한파가 찾아온단다. 그리고 거기에 황사가 추가되었다. 마치 타짜의 곽철용 아저씨가 “한파 묻고 더블로 가.”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타짜의 곽철용



역시나 여행의 신 헤르메스는 이번 여행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방해가 있든지 올해는 꼭 떠나고 말리라. 그동안 푹 쉬고 있었던 롱 패딩이 날 감싸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나는 내일 떠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