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도하다
혼자 떠난 이번 여행은 어딜 갈지, 무엇을 할지, 누굴 만날지도 정하지 않고 출발한 여행이었다.
졸음운전으로 인해 이 세상과 일찍 마감 인사를 할 뻔 한 경험들도 있어서, 난 장거리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이번 여행이 내가 생각했던 그림처럼 그려지지 않을 경우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직접 운전을 하고 가기로 결정했다.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출발한 후 30여분쯤 지났을까, 가는 내내 나의 결정을 후회했다. 우선 네비 앱에 찍혀있던 이동 시간이 3시간이었다. 의자에 조금만 앉아 있어도 좀이 쑤셔하는 나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강풍이 부는 날씨였다. 문을 닫으면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나에게 한 숨 자라고 권유하였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창문을 열면 머리를 세차게 후려치는 찬 바람이 몸을 으슬으슬하게 했다.
이도 저도 택할 수 없는 조건에서 괜히 차 끌고 왔다는 푸념만 늘어놓으면서 내리 경주를 향했다.
첫 발을 내디딘 곳은 문무대왕릉이었다. 통일신라나 문무왕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이 곳을 찾은 것은 아니고, 그저 바다가 있어서 왔다. 혼자 가는 여행, 마음이 심란할 때는 바다만 한 곳이 없다는 내 머릿속의 데이터가 이 곳을 첫 목적지로 정하게끔 하였다.
파도는 세찼고, 물은 맑았고, 갈매기는 많았다. 모래가 곱지 않아 걷기 좋은 길은 아니었지만, 파도소리가 너무도 경쾌했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따라 걷다 보니 저 먼 곳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었다. 꽹과리 소리, 북소리 등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굿을 하는 무속인들이 종종 있었다. 이곳은 기가 센 곳인가 보다. 그러니 그들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굿을 하겠지. 하긴 우리나라 역사에 유일무이하게 통일을 한 왕의 무덤이란 곳인데, 기가 약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느라 바쁘신, 이제는 용이 되어버리신 문무대왕님께 나도 정중히 일거리를 하나 더 부탁드리고 그곳을 떠났다.
문무대왕릉에 이어 감은사지, 불국사, 석굴암을 갔다. 울긋불긋한 단풍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던 불국사를 제외하고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 고요함이 나를 감싸는 곳, 공기가 맑아 시원한 기분이 드는 곳이어서 마음속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 일어났던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여행을 즐기고 싶었는데, 왜 그런 상황들이 발생했으며, 난 왜 그때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계속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지. 유쾌하지 않은 생각들로 얼룩진채 마무리될 뻔 한 여행은 예상외의 곳에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경주월드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경주월드를 향했다. 대기 시간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많은 놀이기구를 타서 가능한 스릴감을 최대한 만끽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나의 이 원대한 계획은 2시간 동안 4개의 놀이기구를 탄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유이용권까지 끊어 최대한의 효율성을 창출하려던 내 생각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나마 나를 달래줬던 것은, 나름의 득도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드라켄’이라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전 세계 6대밖에 없는 어마 무시한 놀이기구다. 20층 빌딩의 높이에서 수직으로 하는 순간 ‘만약 이 안전바가 풀려서 나만 바닥으로 추락하면 어떻게 하지?’ , ‘죽는 건 무섭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롤러코스터를 마지막으로 탔을 때가 커다란 근심도, 고민도 없었을 때였고, 그로부터 몇 년 사이에 난 아직 또래 친구나 지인들이 겪지 않았을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한창 움츠려서 사람들의 시선만으로도 깜짝 놀랐던 시절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가장 좋지 않은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올해 여름, 힘들었을 때 내가 술을 먹고 울면서 지지리도 못난 생각과 행동을 했던 다리를 지나갔다. 그 날은 그 다리 밑에서 축제를 하고 있었고, 난 한 여름밤의 좋은 기억을 만들었다.
만약 내가 그때 잘못된 결정을 했다면 그 축제의 날도, 지금 이렇게 여행을 하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 스스로 세상을 등지려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드라켄’이라는 롤러코스터에서 다시 한번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삶의 의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첫째 날, 마지막 순서로 석굴암에 입장권을 끊었다. 관람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여섯 시가 넘었고, 해는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사람들은 이미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 있었고, 그곳엔 나만이 남아있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은 토함산을 감싸고 올라가는 도로라 커브 구간이 많다. 더구나 가로등 하나 없어서 자동차의 라이트가 없으면 앞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며 내려왔는데, 이 길에 차량은 1대뿐이고, 커브길과 어둠이 주는 스릴 때문에 흥분해버렸다.
그렇게 "나는야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자화자찬을 하며 내려왔고, 다음날 경주월드에서 누릴 쾌감들이 어떨지에 대해 설레어했다.
‘드라켄’에 이어 ‘클라크’라는 놀이기구는 원반이 회전을 하면서 360도 움직인다. ‘파에톤’은 다리 받침대가 없이 좌우를 움직이며 곡예를 하는 롤러코스터였다. 세 개의 놀이기구를 연달아 타고나니 속이 메스껍기 시작하면서 하품이 나왔고 어딘가에 눕고 싶어 졌다.
나만 그런 것 같았다. 같이 탔던 사람들은 신나서 다음 놀이기구를 탑승하기 위해 즐거이 이동을 했고,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나는 내가 스릴을 좋아하고,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스릴에 대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놀이동산에 오고 싶어 했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의 몸뚱이는 놀이기구가 선사하는 스릴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치가 현저하게 낮았다.
나는 나를 정말 몰랐던 것이다. 자신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그 대가로 화장실로 향해 변기 하나를 차지한 후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입안에 품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는 사람들 속의 나를 인지하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학원을 다녔을 90년대에는 학원에서 놀기 좋아하는 수강생들을 위해 단체로 놀이동산도 놀러 가곤 했다.
그 때 에버랜드의 바이킹을 타고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옆에서 웃는 놈들, 그나마 걱정해주는 여사친들 속에서 다시는 바이킹 같은 거 안 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의 그 결심은 내 기억 속 밑바닥에 처박아둔 채 같은 경험을 한 이제서야 다시 소환이 되었다. 사람은 진짜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하긴 그러니까 깍두기 형님들이 또 다시 사람들을 괴롭힐까 봐, '착하게 살자' 라는 삶의 지침을 몸에 새기는 것일 수도 있다.
망각의 빈도가 잦아지는 나도 뭔가 몸에 새겨 넣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이 된다.
첫날 날씨를 제외하고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여행이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가서 경주의 맛집이나 인스타 감성이 물씬 풍기는 핫플레이스를 찾아가진 못 했지만, 음식을 먹고 탈이 나질 않았고, 카페에서 책도 잘 봤다.
물질적인면이나 관계면에서 남는 것은 없었지만, 내 나름의 득도를 한 걸로 만족스러웠다. 물론 언제까지 기억을 할 수 지는 걱정이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