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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Feb 16. 2020

어쩌다 서울

시골쥐, 서울쥐  되다

서른 중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난 한 곳에서 살았다. 태어난 곳에서 초, 중, 고를 다녔다. 새 아파트에서 살고 싶기도 했고,  전학이라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 동네에 애정이 너무도 많아 거주지를 옮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이사를 가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하나,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는 것이었다. 서울 소재 대학생은 고등학생 남자가 봤을 때 굉장히 멋져 보이는 모습이라 당시 고3인 나에게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20대를 인 서울에서 맞이하리라는 청운의 꿈은 수능 도중 밀려오는 졸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며 안녕을 말했다. 결국 대학교도 같은 도시에서 다녔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곳에 뼈를 묻으라는 신의 계시인지 군 복무마저도 집에서 시내버스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옆 도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운명이 시키는 대로 내 고향을 적으로부터 불철주야 방어했다.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업마다 나름의 신입사원을 교육하는 방식이 있을 텐데, 이 곳의 트레이닝 방법 중 하나는 신규직원들 모두 지방에서 2년 이상 근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연수원 생활을 할 때 어디로 발령이 날지 모르지만 바닷가 근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촌 근처에서 일하게 되면 쉬는 날 낚싯대 드리우고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으면서 한가로이 바다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운 좋으면 여러 척의 배를 소유하고 있는 선주 막내딸이랑 사랑에 빠지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사이의 설렘은 혼자만의 꿈으로 끝났다. 교육을 마치는 날 알게 된 나의 첫 발령지는 내 고향이었다. 원칙은 서울과 광역시를 제외한 지방으로 발령받는 것이었지만, 예외로 몇 명이 광역시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하필 나였다.




떠나도 다시 오게 되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나의 운명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개미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개미처럼  탈출할 생각을 접었고 정착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사실 살기는 좋은 동네다. 유치원 때 이사 와서 지금까지 큰 불편함 없이 살았다. 교통도 편하고, 공기도 좋고, 편의 시설과 문화 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어느덧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길들여져 버렸다. 오래된 아파트라 노후된 부분이 문제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리하고 외관은 리모델링해서 애정 가득한 마음으로 일상을 즐겼다. 변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그러한 생활이 불편하거나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회사 내규상 타 지역에서 근무할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우선의 선택지는 가능한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라면 출, 퇴근을 감내할 수 있겠다 생각했고, 조건에 부합하는 발령받고 싶은 지역의 리스트를 선정했다.


혹시 몰라서 해당 지역에서 살게 되었을 때 거주비용도 따져봤다.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거리나 비용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거주 환경이 바뀐다는 사실이 나름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여러 선배들에게 상담도 청해봤지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답변이 없었다.


흡족할 만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인사 발령이 나는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서를 확인해보니 나의 다음 근무지는 서울로 표시되어 있었다.
 

갑자기 서울이라니.

사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서울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우선 체감해보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주거비용, 사람 가득한 지하철, 서울에 대한 나의 무지함 때문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염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로 지원하게 된 것은 내 삶의 터전이 바뀌게 된 것은 확정되었고, 이왕 바뀔 것이라면 확 뒤집어버리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큰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았던 그동안의 삶을 돌아봤을 때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널려 있는 서울에서 살게 되면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될 것 같았고, 다양한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내가 서울로 가게 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여러 조언들을 해줬다.



"집 값이 너무 비싸니 괜히 집 산다고 상투 잡지 말아라"

- 상투는커녕 바지 끄랑이 잡을 돈도 없었다.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니 사람 조심해라"

- 이미 이 곳에서도 두 눈 뜨고 간, 쓸개 다 뺏겼다.


"혼자 서울에서 지내려면 얼마나 외롭겠니"

- 여기서도 혼자 살았다.


"서울에 놀거리,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즐겨"

- 그러고 싶지만 우선 정착부터 해야 한다.


살면서 서울을 가 본 적이 10번도 안 되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이 곳은 나 같은 시골쥐에게는 너무도 거대한 세상처럼 보였기에 스스로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이제는 내 의지로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아직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40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에서 손꼽히는 격동의 움직임이기에 막막함이 크다.


한편으로는 인생사 다 거기서 거긴데 괜히 겁부터 먹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다 서울에서 살게 되었으니 어찌어찌 살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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