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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Dec 09. 2019

인생의 동반자

내 님은 어디에 있나

싱글인 후배가 물었다.


“결혼하니까 좋아요?”


참고로 나의 이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돌싱이라는 신분이 꽁꽁 숨겨야 할 사실도 아니지만, 홍익인간의 이념처럼 널리 널리 알려서 이롭게 할 것도 아니기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 외에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의 이혼을 짐작한 누군가의 물음에 거짓말로 답하지는 않는다.


“네 주변의 결혼한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후배에게 되물었다.


“아이는 이쁜데, 결혼은 별로래요.”


“정답이네.”


난 그리 무심히 말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후배가 또 묻는다.


“결혼하면 내 편이 생겨서 좋지 않나요?”


“넌 그 네 편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해?”


이번에도 되물었고 후배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결혼식


결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생의 동반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태껏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은 나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그 어떠한 보험보다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 줄 것 같다.  


내가 기뻐할 때 함께 축하해주고, 진흙탕 속에서 나뒹굴 때 망설임없이 다가와 일으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내 인생이란 드라마의 상대 배우로 등장하는 것,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행동이다. 


그래서 사랑의 호르몬을 가장 많이 뿜어낼 수 있게 해 줄 사람과, 5성급 호텔의 침대처럼 편안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생활에 활기를 보태어 매일 축제 같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사람과, 하다못해 그나마 나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이란 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살고 아이를 낳는 것만은 아니다. 


당사자들만 행복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꾸려가면 될 것 같지만, 그러기엔 뭔가 많이 부족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다. 만약 안다 한 들 그 마음의 유효기간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가 영원히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결혼식이라는 절차를 치른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축하를 받고 사진을 찍어 증거를 남긴다.


목격자, 사진, 동영상이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아직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증인과 증거물이 넘치는 공개 선언이라도, 이행에 대한 강제성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라는 법적 절차를 통해 완벽한 부부가 된다.



이걸로 보통의 결혼은 완성되었다. 비록 혼인신고가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영원함을 보장하진 않지만, 적어도 누군가 배우자에 대하여 잘못했을 경우 제재나 보상의 근거가 될 수 있기에 함부로 허튼짓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마음 놓고 사랑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살아가며 사랑만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법적 구속력을 통해 영원한 내 편을 만들었다는 확신이 생겼지만, 이 사람이 영원한 내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서서히 나에 대해서 무관심해질 수도 있고, 어느 순간부터 나와 자주 다툴 수 있고, 결국에는 나를 잘 알기에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적이 될 수도 있다. 


부부였던 남과여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순간, 둘의 관계는 인생의 동반자에서 인생의 무법자로 바뀐다. 그때부터는 살면서 가장 힘들고, 짜증 나고, 원망스러운 시간이 펼쳐진다. 


전 배우자는 마치 이소룡으로 빙의한 듯 급소만 정확히 찔러 나를 무너뜨리려 하고, 나 역시 이연걸이라도 되어  상대방의 명치를 찌른다. 그리고 그러한 분쟁은 일회성이 아니기에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렇다면 이혼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내 편이 없는 것일까.


 SNS를 통해 인간관계가 전례 없이 확장되는 만큼 나 홀로 고립되기도 쉽고, 늘어가는 모임만큼 집으로 돌아왔을 때 더욱 소외감이 짙어지는 세상에서 내 편이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특히나 오늘처럼 춥고 크리스마스가 멀지 않은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애정의 연대감을 형성한 사람들을 그저 부러워해야 하만 하는 것인가.


몸으로 직접 겪어서 각인된 사실이지만, 결혼했다고 다들 영원히 함께하진 않는다. 일부는 아마도 이혼을 할 수도 있고, 대부분은 언젠가 사별을 한다. 


영원함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혼한 사람에게는 혼인관계 중일 때보다 선택의 다양성이 보장될 수도 있다. 기존의 누군가와 더 진한 관계가 되거나, 새로운 누군가가 내 인생에 등장할 수 도 있다. 법적인 배우자만이 인생의 동반자라 할 수 없으며,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 전보다 밀도 높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결혼을 해보니까 내 편이 꼭 법적인 배우자일 필요는 없더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달은 이 진리를 후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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