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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 Apr 09. 2021

호시절이라고 믿었던 어느 때

한동안 참 오래도록 '별일이 없는' 때가 있었다.


새로 옮긴 직장은 적당한 긴장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는 곳이었고, 일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이상한 사람도 없어 만족스러웠다. 다른 생각 할 여유를 요만큼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전 직장과 달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잘 챙겨 가면서 일하는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저녁을 계획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쯤 필라테스를 배웠고, 한두 번쯤 친구를 만났고, 한 번쯤 남편 회사에 들러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다. 흔한 말로 워라밸이 괜찮은 직장이었다.


심지어 회사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직원이 2백여 명이 되지 않는 회사에 도서관이라니. 게다가 신착 도서도 간간이 들어오는, 사치스럽게 행복한 공간이었다. 그전 직장에서 몇 년을 지내는 동안 원래부터 책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사람인 양 제대로 읽은 책이 몇 권 없었다. 그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는 곳이었다고 말하면 너무하려나. 암튼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는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매주 기다렸다. 출퇴근길에 듣고 싶었지만 일요일 오전에 업로드가 되면 참지 못하고 그날 오후에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서 다 들어버리곤 했다. 그렇게나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지인 중에는 애청자가 없었다. 엄마 빼고는. 엄마와 나는 극성팬이 되어 공개방송도 저자 강연회도 함께 다녔다. 나중에는 엄마 몸이 좋지 않아 일단 나 혼자 명상도 배워보던 즈음이었다.


점심시간 중 일주일에 두 번은 중국어 회화 수업을 수강했다. 중국인과의 1:1 수업이라 수강료가 꽤 되었는데 회사 복지로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젊은 여자 선생님이라 코드가 잘 맞아서 남자들이 대부분인 직장에서 채워지지 않는 소소한 수다를 여기서 해결했다. 급수도 더 따 볼까 싶어 강의를 듣고 글자를 좀 더 외워보겠다고 스터디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이 잘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잘 지내. 근황이라고 말할 만한 별일조차 없다”라고 대답하기를 수년이었다. 호시절이었다.





아니, 호시절이라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니 모르지 않았는데, 알긴 알았는데, 그렇게나 빠를 줄 몰랐다고 해야 할까. 절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언제 되돌려서 생각해도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울 만큼 멍청하고 또 멍청한 날들이었다. 별일이 없다니. 별일이 없다니.


엄마가 떠나고 난 후, 나는 그중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쓸 데 없는 짓을 그렇게 해대면서 그게 무슨 균형 잡힌 삶이랍시고 잘 지냈나 싶었다.


의미 있는 콘텐츠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어 멍하게 흘려 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만 틀어두었다. 그걸 보며 웃고 있는 내가 너무 황당하고 싫었지만 뭐라도 보지 않으면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머리나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은 아예 가능하지가 않았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만 봐도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훅 하고 올라왔다. 내가 읽은 책들이 엄마를 건강하게 하는 데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는 생각에 몸서리치게 화가 났다. 나 자신이 너무 싫어 나에게 그 어떤 책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지대넓얕은 딱 그 무렵 시즌을 종료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내게 우연히도 딱 맞았던 그 타이밍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중국어 책은 볼 때마다 다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애증의 언어가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카페에 가서 그 날들에 대해 썼다. 모른 척 외면하다가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힘들어도 다 소화하여 기억하고 싶었다. 그 또한 엄마와의 시간이고, 추억이니까. 몇 잔의 음료를 마시며 주룩주룩 울면서 어떤 시간 하나를 겨우 기록하고 나면 그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책을 다시 읽는다. 언제부터였더라. 이제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책을 펼치는 내가 참 새삼스럽고, 송구스럽다.




사진 © bethlaird,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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