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하게도 영상의 시대는 크게 한 발을 늦었다.
엄마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상파에 더해 종편 채널이 많아져 선택의 폭이 조금 넓어진 것만으로도 꽤나 만족스러워하던 그즈음은, 동영상(Video)이라는 것이 지금만큼 모두의 일상에 친숙하고 당연한 콘텐츠 소비 방식이 아니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지하철에서 실물 책이나 신문 읽기가 횡행하던 정도로 옛날 옛적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다들 휴대폰으로 유튜브보다는 뉴스 기사나 글과 사진으로 된 SNS를 보고 있던 그 무렵에 대한 이야기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그 당시만 해도 일상의 기록을 위해서는 대부분 동영상이 아닌 사진을 찍었고, 때때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순간의 말들을 잡아두어야 할 때에는 녹화가 아닌 녹음을 하곤 했었다. 동영상을 더 편하게 다루는 세대의 범위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사진의 비중이 여전히 더 압도적으로 높던 시기였다.
휴대폰 용량이 꽉 차 주기적으로 사진을 지우곤 했던 경험 때문에 비디오는 용량이 무겁다는 인식도 아직 약간 남아 있었고, 카톡으로 긴 시간의 동영상은 용량 상 전송이 불가했을 만큼,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데이터 활용의 대폭발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시점이다.
내가 주목하여 화가 나는 것은 이것이 불과, 고작, 4년여의 시간만에 생긴 변화라는 것이다.
영상의 시대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빨리 우리에게 와주었더라면,
엄마가 통증과 합병증으로 지새운 수많은 불면의 밤의 즐길거리가 되어주었을 테고,
그 무엇보다 엄마가 움직이는 모습과 엄마가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이 내게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다 달았던 시점에 '호스피스', '임종 증상', ‘말기 기적’ 등의 단어들을 인터넷 카페에 검색하다 보면
같은 시간을 먼저 경험한 분들이 꼭 동영상을 많이 녹화해두라고 남겨둔 글들이 마음 어딘가에 툭 걸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엄마가 약 기운에 취해 있어 깨어 있으면서 말을 지속하는 순간들이 많지 않았고,
시대적 특성(?) 상 영상을 잘 찍지 않던 우리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으면 혹시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하며 엄마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 차마 그러지를 못 했다.
또, 아픈 모습으로 기억되기 싫다며 호스피스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던 엄마이기에,
그런 모습을 자꾸 찍어 남기는 걸 싫어할 것 같아 그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면,
그건 그 시간들이 진정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렇게라도 살아 움직이는 엄마를 보고 만질 수 없다는 것의 사무침을 그때 알고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더 최선을 다하여 영상을 찍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가 이미 지금과 같은 영상의 시대가 도래한 후였더라면, 나도 엄마도 늘 하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동영상 버튼을 눌러 자주 이야기했을 거라는 생각에
뒤늦게 찾아온 이 영상의 시대를 나는 내내 미워하고 있다.
먼저 떠난 아기, 아내 또는 엄마를 VR로 구현해서 만나는 프로그램을 곁눈질로 몇 번 볼 때에도
(사람들이 이를 언급해 둔 글이나, 어쩌다 뜨는 유튜브 영상을 잠깐만 틀어도 가슴이 쪼그라들며 눈물이 쏟아져 각 잡고 제대로는 볼 수가 없다.)
기술이 좀 더 발전하면 나도 엄마를 저렇게라도 볼 수 있을까 싶다가도,
저것도 움직이고 말하는 영상이 충분히 있어야 현실감 있게 반영되겠지 하는 생각에 데이터 보유량이 턱 없이 모자란 나는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최근 오래된 사진 속 인물을 ‘딥 노스탤지어’라는 기술을 통해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움짤 속 유관순 열사의 깊은 눈망울과 희미한 미소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딥페이크니 뭐니 하루가 다르게 ‘미래 시대’로 달려가는 듯한 기술의 발전이 나의 이러한 우려를 지워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보게도 된다.
영상의 시대 니가 늦어도 한참 늦은 거야, 올 거면 조금만 더 빨리 오든지 아니면 이렇게 간 발의 차이라는 아쉬움이라도 덜 하도록 아예 한참 후에 오지 그랬냐 이 타이밍은 대체 뭐더냐, 하며 열을 내다가,
엄마, 그냥 엄마가 조금만 더 있어주지 그랬어,
혼자 읊조리다가,
아니야 코로나 시대에 병원 다니려면 더 힘들었을 거야, 의미 없는 가정으로 위안하다가,
엄마 없는 이 시대에 엄마를 대입해보면서, 실체 없는 무언가를 괜스레 원망하며 나는 요즘도 가끔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