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day 첫째 날
새해 첫 끼는 라면이었다.
귀 하나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물을 올렸다. 방과 세상을 가르던 두꺼운 커튼을 젖히자 정오의 햇살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카카오스토리’ 친구들은 각자가 목격한 2014년 첫 일출 사진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지런하기도 하셔라. 정오에 일어나 아점으로 라면을 때우는 누군가에게 그들의 새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부글부글,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냄비를 향해 무심코 뻗은 오른발이 시큰거려 미간을 찡그렸다. 며칠 전 노래방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한 무리 지인들과 모여 ‘치소(치킨과 소주)’라는 새로운 조합을 발견한 뒤 기분 좋게 들어선 곳이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YB 버전의 <담배 가게 아가씨>를 불러재꼈다. “와자자자자자자! 와자자! 와자자! 와자자! 와자자!” 후렴구에 따라 발을 마구 굴러댔다. 문제는 바닥이 새하얀 대리석이었다는 것.
수많은 ‘자’자의 어딘가에서 ‘빡’ 소리가 났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뒤꿈치와 대리석의 잘못된 만남은 결국 상처를 남겼다. 술 마취가 풀린 다음날이 돼서야 통증을 인지했다. 한 발자국 딛기조차 힘들었다. 하필 일요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금이 가지는 않았으나 꽤 큰 타박상을 입었다고 했다. 주사 한 대, 엑스레이 한 방, 반 깁스, 목발 두 개와 십만 원을 등가교환했다. 부들부들 손을 떨며 돈을 냈다.
마음이 수천 갈래로 찢어졌다.
스프와 라면을 순서대로 넣고 타이머를 삼 분으로 맞췄다. 면발이 풀리는 막간을 이용해 노트북을 열어젖혔다. 얼마 전 이 녀석도 주인 따라 다리를 심하게 절었었다. 집에 잠자코 앉아 기사를 쓰던 날이었다. 노트북에 깔아놓은 ‘알약’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하나를 찾아냈다. 치료하라기에 치료했다. 그 뒤로 노트북은 삼룡이가 됐다. 윈도우는 부팅이 되는데 프로그램이 하나도 열리지 않았다. 인터넷 창도, 추억의 게임 ‘디아블로2’도, 심지어 ‘한글’까지도. 더 큰 문제는 컴맹에 가까운 나 자신이었다. 흔하디흔한 ‘컴퓨터 포맷’ 스킬조차 장착하지 못한 벌거숭이. 죽을 맛이었으나 데드라인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국 목발 짚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집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신도림 테크노마트의 한 매장에 도착했다. 12월에 땀에 절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저씨, 작년 여름에 여기서 노트북을 샀거든요. 그런데 윈도우가 뻑난 것 같아요. 다시 깔아주세요.” 아저씨는 내가 건넨 자신의 명함과 헉헉거리는 나, 나를 호위하는 목발 병사들을 번갈아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오만 원은 주셔야 합니다.”
십만 원에 이어 오만 원이라니. 합이 십오만 원이라니!
내가 이러려고 돈을 벌었던가. 갑자기 오기가 도졌다. 곧장 집으로 유턴했다. 스마트폰 검색창에 ‘윈도우 포맷’을 쳤다. 열 시간에 걸친 대수술. 한나절을 죽이고 겨우 윈도우를 살렸다. 온몸이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죽일 놈의 데드라인! 기사 마감까지 하고나서야 겨우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틀 후, 거짓말처럼 스마트폰이 노트북의 유지를 받들어 맛이 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서비스센터로 향해야 했다. 거기서는 백업이 안 된다기에 집으로 돌아와 데이터를 노트북에 옮긴 후 다시 찾아갔다. 내 얼굴은 부글부글, 서비스 기사의 앳된 얼굴은 생글생글. 그렇다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랴. 하릴없이 포맷된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수밖에. 올해 연말은 왜 이러냐고, 의미 없는 한탄을 중얼거리며.
삐빅. 삐빅. 타이머가 울렸다.절뚝절뚝 가스레인지 앞으로 다가가 면발을 들어올렸다. 알맞게 꼬들꼬들했다. 불을 내리고 라면 위에 계란 하나를 살포시 얹었다. 냉장고 안에서 세계 최고 우리 집 배추김치를 꺼냈다. 이번에는 전어 젓갈을 넣어 더 맛있어졌다지. 한 손에는 냄비, 한 손에는 김치 그릇을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방금 켜둔 기사 꼬리말에서 커서가 깜빡거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일단 먹고 보자. 잘 익은 김치 잎사귀 한 조각에 라면을 둘둘 싸서 후루룩! 아삭아삭! 국물도 한 모금, 냄비째 들고 꿀꺽꿀꺽! 뒤이어 터져 나오는 감탄사. 후아아! 어느새 이마와 코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등으로 스윽, 콧등을 문지르며 포만감에 젖어들었다.
새해 벽두부터 라면이었고 연말은 액운의 연속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멀쩡히 살아있고,
라면 한 젓가락과 김치 한 조각에 행복하고,
배부른 포만감이 날 감싸고,
내 앞에 일거리가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남들의 새해맞이에, 나의 액운에, 눈앞의 라면에 우울해하다가도 MSG의 감칠맛에 콧노래를 부르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래, 올해도 이렇게. 청마처럼 멀리 뛰지는 못해도 소소하게, 즐겁게, 열심히, 행복하게, 일상을 즐기는 삶을 살기를. 마지막 남은 국물을 후루룩! 몰아마시고 ‘탕’ 소리가 나도록 냄비를 내려놓았다.
캬아! 내가 이 맛에 산다!
※ 2014년 1월,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고쳐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