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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기고가 강진우 Jul 07. 2015

겁쟁이의 발악

썸day 넷째 날 - 세월호 1주기를 기억하며

“너 운동권이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지질한 재수생 시절을 지나 어엿한 초등학교 교사가 된 친구가 대뜸 물었고, 나는 도리어 물음으로 답했다. “아니, 뭐…. 네 ‘카스’ 보니까 그렇더라고.” 녀석은 한 수 접으며 애꿎은 소주잔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친구 놈이 하는 유일한 SNS라고, 내 ‘카카오스토리’를 유심히 본 모양이었다. 글 쓰면서 먹고산다는데 그 일의 실체가 뭔지 보지 못했으니 도무지 감이 안 잡히고, 그런 와중에 사회 전방위적 문제성 기사들을 수시로 퍼다 날랐으니 ‘이 새끼가 삐라를 쓰는 건가’ 내심 걱정됐을 게다. 피식, 쓴맛이 남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나 북한 되게 싫어한다.” 그 말에 녀석도 피식. 빈 잔이 달콤 씁쓸한 소주로 가득 채워졌다. 


2014년 4월 16일, “대형 여객선 한 척이 진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하고 있지만 승객들은 전원 구조했다”는 말소리가 화면과 함께 흘러나왔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에 몰두했다. 몇 시간 뒤, 비행기 모드로 바꿔둔 스마트폰을 기지국에 연결하자마자 ‘딩동’ 뉴스 속보가 떴다. ‘세월호’라 불리는 배에 500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중 300여 명을 구조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중얼거리며 포털사이트에 접속하고는 아연실색했다. 

외출 전 텔레비전을 통해 본 대형 여객선, 
그 배가 바로 세월호였다.

놀람이 슬픔으로, 슬픔이 분노로 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바통 터치하듯 이어졌다. 하수구로 흐르던 구정물이 지상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관피아, 해피아 등 ‘피아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넘어선 절망을 경험했다. 


2014년 4월 28일,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임시 분향소로 향했다. ‘미안하다’는 내용의 현수막들이 도로가에서 추적추적 비를 맞고 있었다.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하며 뭔가에 이끌리듯 단원고등학교 앞을 찾았다. 친구를 잃은 아이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등교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수많은 꽃다발과 먼저 간 아이들이 좋아했을 간식거리, 진심을 담은 편지들이 자그마한 천막 아래에서 눅눅해져가고 있었다. 그 조용한 진혼제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서가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 옆에 수북이 쌓인 국화꽃을 한 송이 들고 안으로 향했다. 


어른들은 울었고, 아이들은 웃었다. 아이들은 누구도 원망 않는 맑은 눈동자로 어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 숙여 흐느끼고 있었다. 눈앞으로 쏟아질 듯 드높게 포개어진 아이들의 영정 사진과 마주하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무리 중얼거려 봐도 죄스러움은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소매로 눈을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여전히 해맑았다.


2014년 7월 19일, 서울시청광장으로 향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범국민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 자리에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필시 한 번은 유가족들과  함께해야 할 것만 같았다. 시청역 5번 출구를 나서자 노란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이 유가족들에게로 쏟아졌고, 수많은 귓바퀴가 그들의 입술을 향했다. 슬픔과 탄식이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웠다. 


이윽고 유가족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광화문 광장을 목적지로 둔 행진은, 그러나 종각역에서 멈춰서야 했다. 수십 대의 전경 버스, 그리고 수천 명의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보신각공원에 열을 지어 앉은 시민들은 끝까지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마저 ‘잊지 않을게, 끝까지 밝혀줄게’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습니다.

중년의 경찰 한 명이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전경들이 팔짱을 낀 채 한 발짝 앞으로 다가들었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강제 연행 장면들이 떠올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고 긴장의 끈을 바짝 잡아당겼다.


상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더 이상의 충돌은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고, 시민들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괜한 오기가 생겨 광화문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경 버스 행렬이 대로를 따라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우울했다.


그 즈음이었을 게다. 카카오스토리에 온갖 기사들을 업데이트하기 시작하던 때가.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사실은 겁이 나는 것이면서 이런저런 이유들을 갑옷처럼 두른 채 다시 거리로 나서기를 주저했다. 대신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다룬 기사를 SNS로 퍼 날랐다. 세월호가 가라앉기 전까지는 나도 그저 그런 줄 알고 살았기에, 몇 안 되는 SNS 친구들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과 타협한 티끌 같은 발버둥이었다. 


기억하기 싫지만 잊어선 안 되는 2014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술잔이 부딪쳤다. 내 지난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녀석은 “새끼!” 한 마디 하더니 소주병을 내밀었다. 기꺼이 술을 받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운동권이 아니라 겁쟁이라고.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이 자식아?” 입을 삐죽거리자 녀석이 잔을 들었다. 씨익, 한 번 웃고는 또 다시 쨍그랑. 

술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시야가 흐려졌다.

겁쟁이다, 나는. 유가족들과 함께 최전선으로 나설 용기가 내게는 없다. 그래서 후방에서나마 이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간다. 이게 내 헐벗겨진 순도 100%의 삶이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 정도뿐이기에. 


묵묵히 작년 오늘의 일을 기억하며, 

고요하게 소리 지르며, 

타닥타닥 글 쓰며,


그렇게 겁쟁이의 발악을 이어갈 수밖에.




2014년 4월 28일,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임시 분향소에서.  ⓒ강진우




※ 2015년 4월 16일, 블로그에 게재한 글을 고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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