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day 여섯째 날
얼마 만에 맞는 ‘순수한 즐거움’이던가.
신촌의 한 카페를 나서는 나의 입술이 바른 호선을 그렸다. 눈동자는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마냥 반짝거렸다. 안경알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도 벅차오르는 마음을 막진 못했다. 장맛비 내려 온종일 우중충하던 그날은, 참으로 눈부셨다.
A 씨와는 블로그 이웃에 불과했다. 그녀의 포스팅을 보기 전까지는. 글쓰기 모임의 새 멤버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있던 터. 앞뒤 가릴 것 없이 댓글을 달았다. 당신들과 함께하고 싶노라고. 즉흥이 낳은 찰나의 불씨, 이것이 온돌방을 뜨뜻하게 달굴까, 매가리 없이 사그라질까. 답은 만나봐야 나올 것이었다.
신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여 의사를 주고받은 지 한 달여 만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낯섦을 경계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문득문득 발길을 돌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어르고 달랬다. ‘만성이 된 익숙함이 싫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 조금만 더 힘내자.’ 남들 앞에서 밝은 척하는 데는 이미 도가 트여 있었다. 허나 내 안에는 여전히 소심한 어린아이가 칭얼거리고 있었다.
특이한 카페였다. 매장 한가운데에 사람 둘은 넉넉히 빠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글쓰기 모임 오셨죠? 아래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점원의 친절한 안내에 반쯤 떠밀리듯 구멍 속 나선형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텅. 텅.’ 철제 계단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 아래 바닥에 발끝이 닿으면 생면부지 낯선 이가 나를 맞이할 것이었다. 마주하게 될 면면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별 것 아닌 소망을 등불 삼아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안녕하세요?” 사회생활이 선물한 ‘스마일 가면’으로 긴장을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책을 탐독하고 있던 A 씨가 고개를 들었다. 기꺼운 호기심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덕분에 잔뜩 딱딱해져 있던 어깨가 슬며시 풀어졌다. “A 선생님이시죠? 강진우입니다.” 명함에 고마움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A 씨가 빙긋 미소 지었다. 잠자고 있던 설렘이 기지개를 켰다. 산뜻한 첫 만남이었다.
모임을 위해 기꺼이 동탄과 신촌 사이를 오간다는, 열정 넘치는 B 씨까지 합류하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세 사람이 모인 단출한 자리. 허나 그 깊이와 넓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미리 정해놓은 책을 가운데에 놓고 감정과 생각을 나눴고, 15분 프리 라이팅으로 내면과 마주했다. 서로의 글을 주고받으며, 글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목격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글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였다. 나에겐 그저 밥벌이로 전락하고 있었던 글이 그들에게는 습관이자 에너지이자 희망이었다. 눈앞에 ‘글의 거탑’ 두 개가 굳건히 서 있는 듯했다.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가만히 탄식했다.
그런데 여느 때였다면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을 한숨 한 줄기가 불현듯 동아줄로 변해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마음이 끝을 모르고 비상했다. 동아줄의 끄트머리, 그곳에 한 아이가 있었다. 칭얼대는 아까의 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있는 아이였다. 더없이 행복한 웃음과 함께.
A 씨가 사준 점심을 맛나게 먹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먹구름 가득했고 빗줄기가 떨어졌다. 허나 나에게는 완연한 봄이었다. 기쁨이 햇살 되어 정수리를 따스하게 덥혔고, 환희가 바람 되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였다.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글을 매개로 느낀 순수한 충만감, 그것으로 족했다.
용기 내길 잘했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운 표정을 머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