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Aug 22. 2021

인생의 새 지평을 열다

2021년 8월 21일

    인생의 새 지평씩이나 열었다고 하니 무척 거창해 보이지만, 이 일 덕분에 심심하고 무채색인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듯한 얕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쓴다.


    별 건 아니고, 난생처음으로 가사도우미 서비스 플랫폼을 이용해 보았다. 우리 집에 놀러 와 본 적이 있는 친구들은 "보현이가 말은 저렇게 해도 그렇게 지저분할 것 같지 않은데?"라고 했지만, 실은 집안일에 손을 완전히 놓아 버린 지 한 달여 만에 과장 좀 보태서 집안 곳곳에 초파리 일개 소대가 창궐할 정도였다. 너무 지저분하고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 했다. 그나마 방역이 좀 잘 되는 신축 건물에 사는 덕에 B선생님이 행차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사람 사는 꼴로 되돌려 놓을 엄두가 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밀린 집안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도맡아 해내면 내가 환자에서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데 한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강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일에 착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긴 휴가가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수선한 집안 꼬라지를 보기가 싫어 밖으로 돌기나 했다. 큰 비닐봉지에 재활용 쓰레기들을 대강 분류해 놓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현관과 주방에 어수선하게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와 설거짓감을 보고 머리가 아파질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부리고 있는 얼토당토않은 고집은 '머리에 힘을 줘서 우울증을 이겨낸다'는 발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신체 어딘가의 호르몬을 내보내거나 조절하는 부위에 모종의 이유로 고장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생활을 해 나가야만 한다. 가사도우미를 부르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7000~9000원씩 내며 약을 타다 먹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이면 된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집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한 뒤 커피 한 잔 타 마시며 개운함을 느끼던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더 쉬워질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기합리화와 결심을 마치고 나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결과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몰라보게 말끔해져서 몸도 마음도 건강할 때와 비슷해진 방과 화장실, 주방을 보고 한참 감탄했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았다는 생각을 하면 감히 어지럽힐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백신 2차 접종 후 부작용 때문에 삐걱거리고 휘청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서도 애벌 설거지와 분리수거를 대강 했더니, 청소를 한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집이 꽤 깨끗하다.


    엄마의 반응도 꽤 긍정적이었다. 잘 생각했다고, 가끔 그렇게 사람 불러서 치우면 품도 덜 들고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조금 얼떨떨해졌다. 혼자 나가 사는 딸내미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는 것도 충분히 불효 같은데, 기본적인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사람을 썼다고 하면 걱정하실 것 같아서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 무색했다. 접종 이틀째 몸이 가장 아팠던 날에는 엄마에게 오랜만에 어리광을 피울 용기도 냈다. 떡볶이와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같이 먹고 설거지도 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약을 챙겨 먹고 한참 수다를 떨다가 엄마를 배웅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거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 환경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유능한 직원, 좋은 친구,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사람으로 홀로 서야 한다는 강박. 혼자서 뭐든지 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 하지만 나는 이번 주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입사 동기인 친구의 코치를 받아서 연봉협상에서는 삭감 내지 동결보다는 좀 더 나은 결과를 받았다. 1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사회성을 다 써 가는 치약처럼 짜냈고, 최악의 결과만은 면했다. 조금 단단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서 자기 효능감도 조금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플 때도 엄마가 오셔서 돌봐 주셨다. 하다못해 난장판이 된 집구석도 (돈이 오고 가기는 했지만) 남의 도움을 받아서 치웠다.


    "그러니까 상당히 해피한 시간을 보냈네요."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번 주에도 모래주머니를 하나 떼놓았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은 늘 위로가 된다.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울의 근원을 조금씩 파헤쳐 들어가는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