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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ug 28. 2021

일기 쓰기의 장점을 깨닫다

2021년 8월 28일

    지난 3개월여간 우울증 치료일기를 쓰며 상태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주기적으로 기분에 낙차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3~4주간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쾌활하고 힘이 넘치는 상태였다. 나는 평생 아침에 개운한 기분으로 일찍 일어나서 긴 하루를 시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당시에는 뭘 어떻게 하려고 들지 않아도 반짝 눈이 떠졌다. 이불 속에서 뭉개면서 다시 잠을 청하기보다는 아침과 아침 약을 챙겨 먹고 운동을 했다. 힘이 남아돌아서 에세이도 쓰기 시작했다. 오후 10~11시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침대에 기어들어 가서 잠을 잤다.


    그러다가 한 달 조금 넘게 발작적인 불안에 시달리며 바닥을 쳤고, 그 뒤로 다시 3~4주간 알 수 없는 희망과 낙관으로 부풀어 올라서 활발하게 지냈다.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집에서 혼자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는 편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며칠에 걸쳐 술 약속을 잡고 폭음을 하는 일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울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세 번의 통화를 하면서 세 번 다 눈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물론 당분간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회사 사정이라든가, 여러모로 힘겨움을 느낄 만한 제반 상황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을 너끈히 견뎌낼 수 있는 마음의 역치가 낮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 병원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 선생님의 눈이 갑자기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상태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따위를 재잘거릴 때, 그저 전문가다운 무심함과 시큰둥함을 보이며 차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곤 하던 다른 진료 시간과는 뭔가 좀 달랐다. 그리고 "약을 조금 바꿔 볼게요"라면서 치료 약 중 하나를 바꿔 주었다. 그동안에는 아침 약에서 뭔가를 조금씩 빼는 정도였는데, 약을 아예 바꿔 써 본 것은 처음이다. 처방 약의 이름과 종류를 달달 외우고 다니는 환자들도 있는 것 같지만, 난 아직도 내가 먹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뭐든 주시면 열심히 먹겠습니다! 빨리 낫고 싶어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받아 먹을 뿐이다.


    왜 의사 선생님이 인내심을 가지고 치료에 임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종종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처음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경우에는 최소 반년, 재발했을 경우에는 최소 1년은 내원하면서 두고 봐야 한다고 했던가.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우울함이 비에 씻기듯 나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심지어 부지런해지기까지 해서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비정상적으로 들뜬 상태와 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것만 같은 우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제삼자의 눈으로 상태를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을 깨닫는 시간도 더 늦었을 테고, 치료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을 하나 꼽는다면, 약물과 일기의 효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울감을 느끼더라도 스스로 대응하는 방식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힘든 일을 끌어안고 미련스럽게 혼자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친구나 동료에게 위로를 구하거나, 가사 도우미를 쓰거나, 위에 면담을 요청한다. 감정을 속으로 삭이지도 않는다. 새로운 규칙들도 세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분리수거 통을 비우고, 설거짓감과 쓰레기가 되도록 생기지 않게끔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고, 군것질을 하지 않는다. 달팽이가 기는 정도의 속도지만 어쨌든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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