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1일
늦잠을 잤다. 조금 꾸물거리다 보니 금세 병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 약을 한 번 정도는 빼먹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병원에 다녀와서 엄마와 브런치를 먹고 수다를 떨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에 돌아갔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아침밥도 아침 약도 건너뛰고 점심에는 커피까지 큰 놈으로 한 잔을 마셔서인지, 갑자기 이상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다. 빨래를 걷고 청소기를 대강 돌리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까지 했는데도 이상하게 진정되지 않고 시간이 남아돌았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정제인지 안정제인지 모를 무언가가 몸에 들어가질 않아 이렇다는 심증이 고개를 들었다.
불안증과도 닮았지만 기묘하게 긍정적인 기분에 휩쓸리기만 해봤자 썩 이롭지 않기 때문에, 지갑과 에코백만 대강 챙겨서 집 앞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다시 아침 약을 건너뛰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아침에 먹기 편한 레토르트 수프를 잔뜩 쟁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 시켜 먹고 남긴 배달 음식, 배달 음식에 딸려 왔지만 먹지 않은 각종 밑반찬들, 요리에 쓰려고 사 왔다가 유통기한을 넘긴 치즈, 있는 대로 상해서 거의 물처럼 된 샐러드용 채소 따위가 구석구석 처박혀 있었다. 하나하나 다 뜯어서 버리니 2리터짜리 작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거의 꽉 찼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게다가 한가득 나오는 플라스틱 용기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라니. 출처가 명명백백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냉장고를 다 비우고 다시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착수까지 결심과 시간이 필요한 집안일을 대강 마치고 나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저녁 약을 먹은 뒤 탈력감에 휩싸여 잠깐 쉬다가, 약을 빠뜨리는 바람에 경조증 비슷한 게 올라왔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비정상적으로 들떴을 때 과소비를 한다거나 일을 잔뜩 벌린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생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조증을 분출시키는데, 그러고 나면 몸이 너무 힘든 데다 잠은 잠대로 오지 않기 때문에 별로 좋을 게 없다. 약은 꾸준히 제시간에 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