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저는 한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 중인 30대 직장인 여성이고, 마지막으로 재발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4개월째, 생애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舊신경정신과) 문을 두드렸을 때 기준으로는 약 15~16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울증이 발병했던 횟수는 3번으로 기억하는데, 부모님께서는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에도 한 번 정신과에 갔던 적이 있다고 하시네요.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릴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 번까지 더하면 아마도 4번 정도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총 11편의 글을 썼고, 글을 쓰기 시작한 목적은 △발병부터 완치까지의 과정을 건조하게 정리해 차후에 대비하기 위해(다만 "언제쯤 다 나을 수 있을까요?"라고 의사 선생님께 물었을 때는, 무엇을 완치라고 볼 것인지는 굉장히 애매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스스로 증상을 완화하도록 했던 노력을 정리해 길어지는 치료 기간 중 지루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혹시 나도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지인들에게 진료를 독려하기 위해 등 크게 3가지입니다.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목적이 주이기 때문에 글의 구성에 썩 두서가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 글만큼은 세 번째를 주된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제가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제게 물어볼 것이 있다는 지인에게 제안해서 써 내려가기 시작한 글로, 정신과에 대해 막연한 이미지 내지는 두려움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독자로 상정했습니다. 요즘은 정신과 의사들이 편견 해소 등의 차원에서 직접 유튜브 등을 통해 제공하는 질 좋은 콘텐츠가 많은 데다, 제 글은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상담 치료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겠지만, 아무쪼록 이어질 내용이 읽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죽으려는,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몸을 스스로 상하게 할 생각이 드는가?"를 내원 기준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 계단에서 떨어져서 팔다리가 한두 개쯤 부러지면 출근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저 차에 치여서 크게 다치면 출근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저 난간에 목을 매달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죽으면 그동안 모으던 수집품들은 처치 곤란이 될 텐데,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중고장터에 내다 팔 수 있도록 가격표를 붙여 둬야 하지 않을까? 내가 죽은 채로 발견되면 경찰이 휴대폰을 뒤지려고 할 텐데 비밀번호는 미리 풀어 둬야 할까? 집에서 죽어서 집값이 떨어지면 집주인과 건물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지 않을까? 기타 등등.
꽤 구체적이고 끔찍하죠. 이 정도면 꽤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가면 안 됩니다. 상태가 꽤 나아진 요즘에는 당시의 상태를 일컬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했다"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전조가 있기는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은데(이 트윗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언젠가 또다시 우울감을 느끼는 데 더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지면, 구체적으로는 여상하게 해 오던 일들을 수행하기 힘들어지면 재빨리 병원에 가려고 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치료가 끝나고 난 뒤 또 병원을 찾을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이겠지요.
씻는 것을 게을리함.
설거지, 청소, 분리수거 등 일상적으로 해 오던 집안일을 하지 않음.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음. (2번과 연결됩니다. 저는 설거짓감이 산처럼 쌓여도 설거지를 하기가 죽을 만큼 싫어서 그냥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쓰레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또 쌓아 두었습니다. 악순환이죠.)
밖에 나가지 않음. (1번과 악순환 관계에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피하기 위해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함. (저는 우울증이 가장 심했을 당시 온갖 팝콘 콘텐츠를 두루 섭렵했습니다.)
식사량이 비정상적으로 줄어듦. (하루에 물 한 잔만 마시거나,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날도 숱하게 있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어짐.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기 어려워짐.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다 어휘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무어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제 경우만 놓고 보자면, 주기적으로 내원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 번 다녔던 곳이기 때문에 제 차트를 보관하고 있다는 점, 일전에 내원했을 때 크게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 등도 있었습니다.
많은 의사와 환자가 공통으로 말하는 내용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명의 소리를 듣지만 정작 나는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첫 진료에서 의사에게 불쾌한 말을 들은 뒤 상처를 받아서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환자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부리는 걸까?'라고 자책하기보다는 잘 맞는 의사를 찾아서 병원을 여러 군데 가 보는 편을 권해드립니다. 저처럼 집 근처도 괜찮고, 회사 근처도 괜찮고, 아예 큰 대학병원에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좀 귀찮고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나아야 즐겁게 살 수 있으니까요.
초진이라고 말하면 검사지를 받아서 검사를 합니다. 근래 느낀 감정을 수치화한 숫자에 체크하는 방식이 가장 흔합니다. 제가 받은 검사지는 몇 장 되지 않았는데, 책처럼 두꺼운 검사지를 주고 집에서 풀어 오도록 하는 병원도 있다고 하네요. 이후 뇌파 검사와 심전도 검사, 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검사까지 세 개 정도를 했고, 모든 과정이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료실에서는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약을 처방하므로 최대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울증의 경우 보통 초진에서는 눈물을 빼고 나오기 마련이고, 그런 환자들을 위해서 진료실 책상 위에는 늘 티슈 상자가 놓여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진에서는 7만 원 돈 정도가 나왔는데, 물론 병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검사를 받지 않고 상담과 약물 처방만 받으면 진료비가 7000~9000원대로 나옵니다. 체감상 진료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료비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다니면서 한 달에 대략 3만 원여 정도를 병원비로 씁니다. 진료비는 재난지원금으로도 지불 가능합니다.
제 경우 초진 당일에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2번째 진료에서 검사 결과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으며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참고: 우울증이 재발하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그런 걸 알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의학의 세계는 신비하네요.
아무튼 검사 결과까지 받고 나면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됩니다. 상태를 묻고 답하며 약을 조절하는 시간입니다. 통상 "좀 어떠셨어요?"라는 말로 진료를 시작하는데, 수면의 질과 약을 복용한 전후의 기분 상태를 설명하면 됩니다. 숫자를 활용해서 설명하면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울증을 앓지 않던 때를 8~9, 가장 기분이 좋을 때를 10, 우울증이 가장 심할 때를 0, 비정상적으로 들떴을 때는 12~13 정도로 표현했습니다.
약을 조절하는 과정은 대략 이랬습니다. 첫 진료 당시에 받았던 약이 너무 졸린다고 했더니 안정제를 줄였고, 그 뒤로 4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약을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치료 과정을 돌이켜 봤을 때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뜨다가 갑자기 극심한 우울감을 느끼는, 어떤 낙차 같은 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고, 진료 시간에 이런 증상을 설명해 약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마음이 잔잔해진 것을 보면 대충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저는 아직 심각한 부작용을 경험한 적은 없는데, 사람에 따라 자살사고, 변비, 피부 트러블, 체중 증가 등의 다종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니 그럴 때는 꼭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셔야 합니다.
아직 한창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서서히 약을 줄여 나가면서 결국 끊게 된다고들 합니다. 과거에는 딱 죽을 것 같을 때 병원을 찾았다가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멋대로 발길을 끊곤 했습니다만(이러면 절대 안 됩니다), 첫 발병의 경우 6개월, 재발의 경우 1년 이상은 약을 조절해 가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몇 달쯤 내원을 하다 보면 드라마틱한 변화도 느껴지지 않고,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저처럼 새로운 병증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마음대로 약을 끊으면 치료 기간이 더 길어지거나 병증이 더 심해진다고 하니, 꼭 의사의 지시에 따르셔야 합니다.
저는 일정 부분 증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직접 경험한 뒤로 약물치료를 거의 찬양하다시피 하면서 주변에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다만 꾸준히 시간 맞춰 복용할 때를 전제로 하며, 약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약을 꾸준히 복용한 뒤 경과를 보며 약을 조절하기 때문에 약을 자꾸 빼먹으면 정확히 치료 단계를 밟아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필수는 아니고 선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약을 복용하는 과정에서 증상의 변화 등을 꾸준히 기록해 나가면 진료 시에 상태를 설명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가 쉬워집니다.
물론 약물이 모든 병증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는 것,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꼭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라도 잠을 제때 충분히 못 자고 끼니를 챙기지 못하면 쉽게 날카로워지곤 하니까요. 다만 배달 음식은 손쉬운 자극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집이 어질러지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밥을 지어 먹는 것이지만, 여의치 않다면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될 때까지는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편이 낫습니다. 설거짓감이나 각종 쓰레기가 생기지 않으니 집안 청결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어쨌든 바깥에 나가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일도 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것들이고,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면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에, 간단한 규칙을 만들면 좋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이부자리 바깥으로 나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거나 하는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저는 병원에 다녀오는 날을 쓰레기 분리 배출하는 날로 정했더니 현관에 쓰레기가 쌓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기본적인 신변을 돌보는 것조차 힘이 든다면, 굳이 모든 일을 스스로 하지 않으려 해도 됩니다. 제 경험상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치료에 꼭 도움이 됐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치료 도중 갑자기 우울증이 다시 심해졌을 때 초파리 떼가 창궐할 정도로 집안일을 방치했었는데, 일상생활을 본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서 가사 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했고 꽤 도움을 받았습니다. 가사 도우미가 다녀간 뒤로는 집을 크게 어지르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일도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운이 좋게도 가까운 이들에게 치료 사실을 밝혔을 때 '기합으로 이겨내라', '노력으로 극복해라' 운운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울적해 할 때면 억지로 끌어내서 맛있는 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 준 친구들 덕분에 비교적 호전이 빠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는 병원 대기실 벽에는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살다 보면 생선회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갈 수도 있고, 호르몬을 담당하는 모종의 신체 부위가 고장 나서 정신과에 갈 수도 있습니다. 병원 대기실 소파와 쿠션은 푹신하고, 늘 시원한 선풍기와 에어컨이 돌아가고, 늘 환자들로 북적거리지만 조용합니다.
그런데도 정신과는 무서운 곳입니다. 정확히는 정신과라는 곳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습니다. 그 탓에 발병 초장에 자신에게 파멸의 낙인이 찍힌 것처럼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최대한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울증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고, 그걸 위해 정신과가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이 뻘밭 같은 우울증에서 벗어나서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