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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Sep 25. 2021

저녁 약을 증량하다

2021년 9월 25일

    2주간 밤에 거의 숙면하지 못했다. 2번의 진료에 걸쳐서 수면의 질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을 열심히 어필했더니, 반쪽짜리였던 저녁 약 중 하나를 온전한 한 알로 바꾸게 됐다. 잠을 깊게 자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약 4개월간 정신과 통원을 하면서 저녁 약을 바꾼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잠이 드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 내용보다는 숙면용 영상으로 유명한 '우주 끝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틀어 놓으면 잠들 때까지 15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꼭 새벽 2시30분에서 3시30분쯤, 그리고 4시30분에서 5시30분쯤, 이렇게 두 번씩 잠에서 깨곤 한다.


    그러고 나면 6시 언저리에 다시 눈을 뜨는데, 이때쯤 되면 눈이 뻑뻑하고 피곤한데도 도저히 잠자리에 누워 있을 마음이 들지 않아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아침 약을 먹고, 전신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배가 고파져서 점심을 먹고, 퇴근 시간쯤 되면 또 배가 고파져서 오후 6시쯤 저녁을 먹고 저녁 약을 먹는다. 3시간쯤 지나면 또 배가 고프지만 이때 뭘 먹으면 십중팔구는 악몽을 꾸기 때문에 오후 10~11시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든다.


    규칙적이라면 규칙적이고, 아침 시간만 떼어 놓고 보면 요즘 유행한다는 '미라클 모닝'이 부럽지 않을 정도지만, 기실 그 질은 매우 좋지 않다. 부지런해진 것도 무엇도 아니고 뭔지 모를 호르몬의 신묘한 장난질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에 이걸 이용해 보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깊게 자지 못하게 된 뒤로는 늘 조금씩 피곤한 상태다. 오늘도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반쯤 정신이 우주로 날아간 상태로 눈만 자라처럼 끔벅대고 있었다.


    감정 기복은 많이 줄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푹 꺼지는 일이 거의 없어진 듯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기분이 위쪽으로 널을 뛰곤 했지만 이제는 딱히 그렇지도 않다. 약을 바꾼 첫 주에 다리를 미친 듯이 떨어대고 걸핏하면 물을 마시러 벌떡 일어나곤 하던 증세도 사라지다시피 했다. 집중력도 많이 돌아와서, 연휴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하고 이틀 동안은 소처럼 일만 했다. 불과 한 달 반쯤 전까지만 해도 살아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고 염병천병을 하면서 연명의료 의향서 따위를 찾아보고 있었던 주제에, 근래에는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계속 자극을 받는 것은 무척 피곤했다.


    마음이 잔잔해지고 나니 주변을 다시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의미 없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 사고 방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면서 진정한 자립의 의미에 대해서도 되새기게 됐다. 혼자 오만떼만 것들을 다 해내려고 발악하다가 번아웃이 온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립했다고 볼 수 없다. 일단 아무도 나에게 그러라고 시키지 않은 데다, 어쨌든 사람은 무리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오면서 문명을 발달시키고 번성해 오지 않았는가. 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적 동물이라는 태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혼자 살 수 있다고 건방지게 굴지 말지어다. 그럴 수가 없으니.


    손님맞이 대청소는 며칠 전에 끝냈지만, 청소기나 한 번 더 돌리러 가야겠다. 조금 있으면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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