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자가 아니어도 만나 줄래요?
그렇다고 한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안 깬다. 이제야 정신을 차려서 노트북을 열었더니, 어제 기사 쓰느라 열어 놓은 십수 개의 인터넷 창이 시야에 덮치듯이 다가와서 잠시 아찔해졌다. 뭘 좀 먹고 난 다음에 늦은 마감을 치면서 업보를 청산해야겠지만, 다시 어제 저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집으로 일찍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간은 도무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어도, 대체로 이럴 때는 그런 기분과 정반대로 가는 판단을 내려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사람을 만나야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때문에 버티며 일을 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 사람이라는 버팀목이 없으면 버틸 이유가 없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최근 자주 했다. 함정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일들로 머리가 복잡한 김에, 어제 술자리에서는 마구 때려 부은 술기운을 빌려서 '답정너' 같은 질문을 했다.
"기자 하기 싫어요, 계장님. 제가 기자가 아니어도 절 만나 주실 거예요?"
그랬더니 같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던 취재원(이제는 이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가까워졌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보현이 너는 이제 사회부도 아닌데, 내가 경찰이라서 나를 만나냐?"
그건 아니죠. 쉽게 수긍하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늘 말하지만 관계는 상호적인 것인데, 왜 내가 쏟은 애정을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자꾸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내게 쓸모가 없다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는 의심과 걱정도 결국 거기서 왔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너를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사인을 보내 주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이유다.
내가 망한 연애에 화를 내고 있던 몇 달 전에도 그랬다. 한 친구는 "걔는 '보현이가 옆에 끼고 있을 정도면 애가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은가 보다'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감지덕지했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기막혀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신선했다. 자기 평가가 불필요하게 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해 봤다.
"내가 눈이 그렇게 낮아?"
"어."
무척 고맙긴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또 다른 친구는 '씨발놈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봤네' 같은 말을 들으며 위안을 얻는 것이 스스로 좀 우습다고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하지만 맞는 말이잖아?"라고 몇 번을 말했다. 그 친구는 나더러 보는 눈을 좀 높이라고 하면서 "다음 남자친구는 우리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남자친구랍시고 별 거지발싸개 같은 새끼를 데려오면 등짝을 아프게 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의외로 내가 사랑받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나이를 먹고서 말이다. 여태 안 그러려고 한 적은 없지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