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피해자로만 남기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참 많은 내가 요즘 싫어하는 게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절교'라는 말을 쓸 자리에 '손절'이 대신 들어가는 것이다. '손절'이란 본디 주식 시장에서 많이들 쓰는 말로 알고 있다.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가진 주식을 얼른 털어내는 '손절매'(損切賣)의 약자라고 한다. 반대말로는 '이익 실현', 혹은 '손절'에서 파생된 '익절'이 있다. 요즘 개미들 사이에서는 '익절' 쪽이 더 널리 쓰이는 것 같다.
말과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치들의 직업병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휘를 적확하게 쓰지 않고 뜻이나 느낌만 통하면 된다는 듯이 뭉개고 들어가는 행위를 무척 싫어한다. 많은 경우 '손절'이라는 말이 그렇게 쓰인다. 관계를 단절하고 교류를 끊는 일의 의미를 더하고 뺄 것 없이 알맞게 담은 단어가 있는데도 '절교(단교, 절연)한다' 대신 '손절한다'라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 거부감이 든다.
이런 반박도 있을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니 '손절'만 예외로 둘 필요는 없다는 것. 또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나 관계를 끊어냄으로써 더 이상의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에서 쓰는 말이므로 이보다 더 '적확'할 수는 없다는 것. 나는 후자로 인해 전자를 경계하는 쪽이다.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자 상대방과 내가 함께 보낸 시간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내가 A라는 사람을 좋아해서 잘 알고 지냈다고 치자. A는 이기적이거나, 게으르거나, 쩨쩨하거나, 뭐가 됐든 관계를 맺은 상대방을 힘들고 곤란하게 하는 어떤 악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A와의 관계를 더는 지속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유행대로라면 A와 '손절'한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이겠지만, 나는 '절교'한다고 하는 쪽을 택하겠다.
그러니까 '절교'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 사이에는 다리가 하나 있었고, 나는 그 다리를 넘나들며 내 세계를 바깥으로 넓히는 것이 즐거웠다. 비록 이제 더는 즐겁지 않으니 내가 나서서 다리를 막아 놓겠지만, 너라는 섬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반면 '손절'은 관계에서 느꼈던 행복을 모두 부정한다. 과거 아름답다고 여겼던 섬이 더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다는 이유로 폭격기를 띄워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정도의 차이다.
내가 A를 좋아한 것도, A가 나를 힘들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A를 '손절'한다면 내가 과거 A를 좋아했기 때문에 교류했다는 사실이 지워지고, A가 나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내가 A와의 관계에 있어 피해자 위치에 있다는 입장만을 강조하게 된다.
물론 폭력을 휘두른다거나, 목숨을 위협했다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크게 입혔다거나, 사회적 평판을 망가뜨렸다거나, 기타 등등의 끔찍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상대방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싶은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가 틀어지는 많은 이유 중에는 극단적이지 않은 것들도 있을진대, 과거 한 단면을 장식하고 있는 추억을 '피해 사실' 정도로 퉁쳐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좀 서글픈 일이다.
혼자 투덜댄다고 해서 '손절'이라는 말이 주식 시장 외에서도 널리 쓰이는 추세가 사라지지는 않을 터이다. 그럴 목적으로 쓴 글도 아니다. 좀 고집스러워 보이더라도 위와 같은 이유로 해서 '손절'이라는 어휘의 사용을 되도록 지양하려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쓴 글에 가깝다. 그보다는 '절교'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도록 오지 않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