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4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카레가 끓어 넘쳐서 인덕션에 온통 눌어붙었고, 카레를 통에 옮겨 담다가 옷에 튀어서 빨래를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요거트는 고작 한 시간 덜 발효시켰더니 완전히 망했다. 허탈해서 주저앉아 있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좀 더 명료한 언어로 정리해 진짜 내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정신과 의사들이 많이들 추천하는 방법이다. 감정을 설명해서 이름을 붙이고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
모두 평소에 무리 없이 해 왔던 일들이지만, 사소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다 망친 것도 아니다. 마음에 들도록 되직하지 않더라도 요거트를 먹을 수는 있다. 빨래를 했더니 옷은 다시 깨끗해졌다. 인덕션은 나중에 엄마한테 베이킹소다를 좀 얻어다가 다시 닦아 보면 된다.
다만 도저히 밥을 할 기분이 들지 않기도 했고, 분풀이를 할 구석이 필요했기 때문에 햇반과 냉동 볶음밥과 레몬즙과 오트밀과 두부를 배달시켰다. 요거트는 몇 국자를 따로 담아서 오트밀을 부어 놓았다. 오트밀을 충분히 불려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것이다. 저녁밥을 챙겨 먹었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 그리고 바흐를 듣기로 했다. 대체로 인간성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머릿속이 번잡할 때는 이만한 게 없다.
아무튼 그럴 수도 있는 어느 날 고작 자기연민에 탐닉한다면 그만큼 미련한 짓도 없을 것이다. 자기연민은 질색이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해롭기는 마찬가지지만, 우울증 환자에게는 극약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