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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r 27. 2023

엄마, 나 낳지 마

내가 당신을 다 이해한다는 어떤 오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딸들이 엄마를 보며 가지는 죄책감은 본능 같은 거라서, 시간을 거슬러 내 또래의 엄마를 만난다면 "엄마, 나 낳지 마", "나 안 낳아도 되니까 아빠 만나지 말고 결혼하지 마"라고 말하겠다는 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은 아마 드물 것으로 생각한다. 총명하고 진취적이던 여성이 결혼 후 가정에 들어앉아 온갖 부조리를 감내하며 부속물 역할을 해야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지 않고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저 말이 처음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던 몇 년 전에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딸들의 심정에 조금 더 동의하는 편이었다. 당장 우리 엄마부터가 모든 걸 자기 손에 틀어쥐고 놓지 않으려는 친할머니, 유약하고 무능력한 아빠 옆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맨땅에 헤딩'으로 자식 둘을 이만큼 길러냈기 때문에 거기서 느끼는 부채감이 엄청났다. 비록 나는 다른 집의 딸들과 비교하면 젊은 시절 엄마의 반짝이던 꿈과 신념 등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나의 존재 자체를 엄마의 인생을 좀먹고 가두는 어떤 걸림돌처럼 여길 때가 있었다.


    다만 요즘은 선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우리 엄마의 모바일 메신저 상태 메시지는 "넌 너무 잘 살고 있어, 칭찬해!"이다. 엄마는 자녀들을 포기하고 뒤늦게라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한 사람 몫을 하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쪽을 택했고, 그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용감한 선택을 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고, 마침내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내 잣대에 비추어 무작정 연민부터 하는 것은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일 내가 나와 동생을 낳고 길러낸 엄마의 삶이 순전히 불행했다고만 여긴다면, 그리고 그것을 엄마가 알게 된다면, 엄마는 "날 왜 낳았어?" 정도의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 쏟아부은 엄마의 삶과 노력과 사랑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엄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내가 엄마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어쩌면 자기 연민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를 싸구려 동정심을 품고 있기보다는, 엄마와 보내는 시간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편이 낫다고 본다.


    나는 엄마처럼 강인한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영원한 어린아이로만 남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가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 온 30여년의 시간들이 그저 고단했다고만 단정하고 피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내 모습도 받아들이기 쉬워졌다. 그리고 낳을지 어쩔지도 모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열 달을 직접 품은 아이를 안아들게 된다면, 나는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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