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출입처를 옮긴 선배의 환송 모임을 뒤늦게 했다. 내 담배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출입 기간이 워낙 길어 발도 넓은 데다가 성품이 무척 푸근하고 친절한 양반인지라,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술잔을 부딪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약속 장소인 식당에는 내가 가장 먼저 와서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선배가 나를 보자마자 "잼버리 뉴스 볼 때마다 보현이 생각을 했어"라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거무스름해진 눈가를 선배 쪽으로 돌리며 말없이 웃고는 소맥을 열심히 말았다. 내가 꽤 오랫동안 정신과에도 다니고 심리상담도 받았다는 걸 아는 다른 동료 기자가 잔을 받아 들며 "잼버리고 뭐고 보현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돼 죽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모든 것들을 잠깐 뒤로 한 채로 온전히 휴가를 즐길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실은 휴가 기간에도 꽤 시달렸다. 연차 다섯 개를 꼬박 붙여 썼는데도 제대로 쉰 것 같지가 않다. KTX에 몇 시간은 실려 가야 도착할 수 있는 타지에서 저녁을 먹다 말고 식당에서 뛰쳐나와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충 마무리를 한 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전부 내렸다. 알림도 아예 꺼 버렸다. 기차표와 숙소를 예약하기 몇 주 전, 어느 가게의 사장님이 '여름휴가, 돈 떨어질 때까지'라고 갈겨쓴 골판지를 가게 앞에 써붙인 사진을 보고 깔깔대며 웃었던 적이 있다. 휴가만 갔다 하면 이 사진을 프로필에 걸겠노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런 사소한 여흥조차도 즐기기 눈치 보이는 상황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현실감각을 잊게 만드는 놀이기구와 뙤약볕 아래 미지근한 물에서 즐기는 물놀이, 천둥 번개 세례와 함께 비가 가로로 쏟아지던 호텔 수영장은 즐거웠다. 저녁부터 밤까지는 대개 술독에 빠져 있었다. 휴가 끝물에는 소화불량 때문에 위장에 휴식 시간을 줘야만 했다. 술을 마실 때는 침구나 소파에 파묻혀서 시답잖은 내용의 유튜브 클립을 곯아떨어질 때까지 봤다. 어느 먼 나라에서 길게는 몇백 년 동안 이어진 분쟁의 역사,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재자의 생애 따위를 들여다보다 보니 내가 가진 고민은 아주 시시하고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저울질하며 위안을 얻는 행위를 혐오했었는데, 궁지에 몰린 나 역시도 그저 그런 인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