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펑 터질 정도가 되어야 글이 잘 써진다는 것이 지론 아닌 지론이었으나, 요즘은 감정이 뉴스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것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다. 사실 나는 인류라는 종의 황혼기에 태어나 민주주의라든지, 공화주의라든지, 자유라든지, 뭐 이런 것들을 아이스크림 가게 맛보기 숟가락으로 운 좋게 한 입 떠먹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내게 50~60년가량 남은 시간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밤의 연속은 아닐까? 그 긴긴밤 동안 나는 잠들지도, 깨어 있지도 못하고 내내 뒤척이면서 단 한 입 맛보았던 인류의 황혼을 줄곧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한다. 노력은, 한다.
하지만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엄마 뱃속에서 가지고 태어난 염세주의가 폭발하는 나날이 이어진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이 좁은 땅에 감금되다시피 해서 비참하게 굶어 죽고, 소셜미디어로 생계를 이어 나가던 네팔 사람들이 밥벌이 수단을 틀어막혀 수도에 불을 지르고, 세계에서 가장 큰 빙산이 형체를 잃고 부서져 내리고, 이민자 단속을 핑계로 공항 세컨더리 룸으로 끌려 들어간 입국자들이 되도 않는 트집을 잡히면서도 모멸감을 꾹 참아야 하는, 뭐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 때문에. 그 와중에 미 국무부에 신고해서 비자 발급을 못 받게 만들어 주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최근 들었다. 당직 근무의 피로에 절어서 눈이 가물거리는 와중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시든가요.
탈조선이라는 말이 시대정신처럼 쓰이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일텐데도 내게는 꼭 사어처럼 느껴진다. 지금 와서는 모국어를 쓰면서 가족, 친지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편이 백 배쯤 낫다는 생각만 든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어떤 나라든 내재된 부조리 내지는 다 갈등의 씨앗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나마 대통령 탄핵 두 번 정도는 선녀가 아닐까 싶지만, 3개 통신사 앱이 푸시 알림을 통해 친절하게 쑤셔 박아 주는 작금의 여의도 꼬락서니를 보면 국회의사당 지하 깊은 곳에 태권V 대신 시한폭탄이 묻혀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정리를 하는 편이 좋겠다.
최근 사귄 펜팔은 나와 비슷한 나이의 폴란드 사람인데, 20대 때 기자 일을 했지만 지금은 광고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다 비슷하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그 말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는다. 특히 지금처럼 내 손끝의 자판을 통해 흩뿌려지는 바이트 조각이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할 수는 있을지 의심스러워지는, 거대한 허무의 폭포에 휘감긴 것만 같은 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