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탯줄 잘못 잡으라고 칼 들고 협박함?
나는 기자가 뭔지도 잘 모르고 일찌감치 기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로, 학내 언론을 시작으로 여러 시민단체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했다. 당시에는 인턴이라고 부르긴 했었다. 순진한 생각에 기초한 발상이었다. 나는 기초생활수급 관련 상담을 받으러 간 어머니가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따님이 공부를 잘하셨던 모양이에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교 성적이 괜찮았다.(해당 지자체의 대학 진학률은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라에서 받은 게 있으니 그걸 돌려줘야 한다"라고 내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여기에 내 기질적 허영심과 알량한 정의감, 그리고 몇 가지 계기가 더해져, 좋은 기자가 되려면 마땅히 그런 곳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대 초반 무렵에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일했던 어떤 단체에서 개최하는, 지금은 뭐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내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로서는 그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왕복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 집안 곳곳에 숨은 동전을 닥닥 긁어 기어이 왕복 차비만큼을 만들어 낸 다음 근처 지하철역에서 교통카드를 충전해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모양새였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은 어떤 종류의 열패감이었다고 비로소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나와는 평생 말을 섞을 일도 없었을 사람들과 '부모님 인맥'으로 알고 지내며 반갑게 인사하는 또래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노력'을 해도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누군가는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채 잡혀서 강제로 확인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수년 후, 나는 짧은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받았던 것을 합친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욕설 이메일을 기계적으로 읽지도 않고 삭제하고 휴지통을 비우는 일을 출근 직후 루틴에 추가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체 누가 수사 진행 상황을 흘려주는 거냐고, 내가 흘려주는 내용을 한 번 받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고 이를 갈며, 거의 악에 받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순탄치는 않았다. 수십 년씩 편집국 차원에서 사회 각계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온 소수의 매체를 제외하면, 취재할 구멍이란 구멍은 다 틀어 막혀서 대체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다. 매일 특정 일간지의 1면 보도를 체크하고 한숨을 푹 쉰 뒤, 기자실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 전화통에 불을 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옹색한 구멍을 틀어막은 것이 정권의 비호를 받는 수사 당사자라는 점이 나를 더 기가 막히게 했다.
그의 딸은, 아마 자기 딴에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해피캠퍼스와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재한 자기소개서와 합격 수기 등에 그런 자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것이 아주 전형적인, 3루에서 태어나서 손쉽게 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주제에, 타석에 선 사람들에게 왜 노력을 하지 않냐고 다그치는 사람의 자신만만함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에게 주어지는 기회란 것들이, 그와 같은 아버지가 없는 나와 같은 평범한 학생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라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노력은 한다. 곰팡이가 득실대고 장마철마다 물이 새는 집을 2년에 한 번씩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족들도 노력했고, 나도 노력했으니까.(하지만 아직도 영화 〈기생충〉은 안 봤다. 계단을 올라야 변기에 앉을 수 있는 반지하방 특유의 화장실을 보면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아서 그렇다.)
그런데 내가 내심 존경하던 사람들, 성장기 나의 가치관과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명사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그 일가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다들 저러고 사는데, 검찰 개혁이라는 기치를 들고 나와 밉보였기 때문에 '먼지털이식 수사'를 당한다는 취지였다. "번듯한 부모 밑에서 크지 못하면 수꼴 마이크를 잡는다"며 빈정거린 언론인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꿈꾸던 직업, 다달이 밀리지 않고 꽂히는 월급, 가족들과 나눠 먹을 간식을 사 들고 퇴근할 수 있는 여유, 내가 내심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 거쳐 와야만 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 와중에도 회사 이메일 계정에는 빠르게 익명의 욕설 이메일이 쌓이고 또 쌓였다. 기레기. 기득권. 기타 등등. 교무실에서 교사용 문제집을 얻어다가 문제를 풀고, 기초생활수급자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을 다니다가 졸지에 기득권으로 명명되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나와 동료들의 기사는 '검찰 개혁의 방해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친절하게 박제됐다. 얼굴과 신상정보가 유포되어 고초를 겪은 동료들도 숱했다.
생채기를 안은 채로 여러 부서를 전전하는 사이 수사가 마무리되고 형사재판 확정 판결이 나왔다. 친위 쿠데타로 전국이 뒤집어진 직후였다. 그 결과를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 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은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야권의 순교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사면·복권되어 금의환향하실 텐데, 아무리 시대정신이 '억울함'이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 이제는 더 화낼 기운도 없다. 그냥 하고 싶은 것 다 하세요. 난 잘 모르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