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친없찐의 눈물 버튼

by 보현

*영화 〈위키드: 포 굿〉의 스포일러 있음


선천적·후천적 사유로 무리 동물로서의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의무 교육 기간은 지옥이다. 내 경우 전자는 기질이었고, 후자는 가정환경이었다. 불안한 자아를 어떻게든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외부 세계와 원활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물론 다양한 부류의 아동·청소년을 한 공간에 모아 놓고 상호작용의 원리와 응용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공교육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이므로, 아마도 내가 학교에서 튕겨 나가면서 그것을 배울 기회조차 스스로 놓아 버렸다면 지금쯤 삶이 더 힘들어졌을 터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주류 사회의 가치와 있는 힘을 다해 불화하는 한편으로, 단 한 줌의 정상성을 놓지 못해 그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므로, 나를 주류 사회의 정상성 끄트머리에 매어 놓을 수 있는 도구(성적과 학벌)에 천착함으로써 한 줌짜리 자존심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쨌든 그 시절을 지나쳐 오면서 당사자가 느끼는 고충은 별개라는 것이다.


특히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동성 주류 그룹과의 원활한 소통이 버겁다. 성인이 된 이후 최소 필요 수준의 사교성과 사회성을 간신히 익혀서 어떻게든 그럭저럭 밥벌이를 하고 사는데도, 또래 집단으로부터 은근히, 때로는 대놓고 백안시당하는 경험은 어떤 상흔 같은 것으로 남아서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이 자리를 빌려 근 20년째, 혹은 20년 이상 나와 사귀어 주고 있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보낸다. 너희들 덕분에 내가 인간 노릇하면서 살고 있어.)


2012년 오리지널 초연 〈위키드〉를 처음 관람했을 당시에는, 쉬즈 대학의 엘파바가 꼭 어린 시절의 나처럼 느껴졌다. 방어기제 때문에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지만, 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여린 소녀. 비록 종래에 꿈과 이상이 꺾여 버리기는 하지만, 그 소녀가 자신을 마음 깊이 이해하는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만나 또 한 계단 성장하고, 스스로 결정한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심지어 그 친구는 학교 제일의 인기인으로, 누구에게나 모자람 없이 사랑받지만 진짜 친구는 나 하나뿐이라며 기꺼이 알을 깨고 나와서 나의 유지를 이어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정을 키워 나가는 우여곡절 속에서 양쪽 모두 정신적 성장을 경험한다. 뭔지도 모를 감정이 북받쳐서 인터미션 동안 꺽꺽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증이 가장 심하던 무렵에 임주연 작가의 〈씨엘〉을 정신 못 차리고 봤던 것도 같은 결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어떤 로맨스보다도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패밀리어와의 관계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고, 패밀리어는 상대방이 어떤 미친 짓을 하더라도 그저 지지하고 사랑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여성 호모 소셜에서 배제되고(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악랄하게 굴었던 몇몇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동성 동급생들이 딱히 내게 뭘 잘못하지는 않았다고 지금 와서는 생각한다) 모의고사와 학교 성적으로 박살 난 자존심을 이어 붙이려 고군분투했던, 우울한 사춘기 청소년이 원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국내 오리지널 초연에서 받았던 (긍정적 의미에서의) 충격을 10년 이상 마음에 품고 살아가다가, 영화화 소식이 발표됐을 때부터 줄곧 극장에 가서 보겠노라고 벼르고 있었다. 비록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영화관은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관객을 환대한다는 인상을 싸그리 표백하고 푯값만 싸가지 없이 올려 가면서 정을 있는 대로 떨어뜨리고 있긴 하지만, 큰 스크린과 빵빵한 사운드로 위키드 처돌이가 그려 낸 무대 밖의 위키드를 꼭 경험하고야 말리라는 의지가 있었다. 또 간간이 대극장 내한공연만 큰맘 먹고 보러 가는 라이트한 소비자라서(라이선스 공연은 가사의 말맛이 덜하다고 느껴서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위키드를 보고 나서야 무대 예술의 의의를 깨달은 터라, 영화라는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어떻게 다른 종류의 감동을 줄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지난해 개봉한 1막은 기대 이상이었다. 일단 엘파바와 글린다의 서사를 이미 모두 아는 채로 보았기 때문에, 'No one mourns the wicked' 넘버부터 눈물을 좍좍 흘릴 준비가 다 돼 있었다. 오즈민들이 사악한 마녀의 죽음을 기뻐하며 합창할 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마녀의 형상에 횃불을 던져 넣는 글린다의 모습에 1차 눈물 버튼, 그리고 대망의 'Defying Gravity'에서 글린다가 둘러 준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로 떠오르는 엘파바의 모습에 2차 눈물 버튼.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줄줄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1년의 인터미션 후(정말 너무하시네요) 개봉한 2막. 솔직히 걱정이 좀 있었다. 온갖 인기 넘버와 극적인 장면을 다 몰아넣은 1막에 비해 2막은 힘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라, 이걸 무려 2시간 17분으로 주욱 늘려 놓은 영화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잘 가늠이 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뮤지컬 서사에 나 있는 구멍을 메꾸려고 영화 오리지널 넘버도 2곡이나 새로 넣고, 이런저런 노력을 한 듯한 흔적은 보이는데, 차라리 구멍이 있는지 없는지 볼 틈도 없도록 몰아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엘파바와 글린다가 'For good'을 불렀죠? 글린다가 'Glinda the Good'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했죠? 딜라몬드 교수님도 강의실로 돌아오고, 더럽고 치사해서 못 살겠다며 탈주하던 동물칭구칭긔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죠? 내가 무슨 힘이 있나. 3차 눈물 버튼 눌러야지.


모든 비극과 비밀을 끌어안은 채로 외롭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뮤지컬의 글린다와 달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리머리가 글린다 앞에서 펼쳐지면서 글린다가 무언가를 얻어 간다는 암시가 나온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상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게 고단해서 마음이 힘든 콘텐츠를 보지 못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저 좋았다.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풀지 못한 인생의 숙제나 고민거리에 대한 실마리를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제시하거나, 상처를 대신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애쓰고 노력했음에도, 20년 전의 음침하고 우울하고 세상 근심 걱정은 다 짊어지고 매일 얼굴에는 먹구름을 두른 채로 살던 소녀와 아직 전부 화해하지는 못했다. 이런 내게 완벽하지 않고 이곳저곳이 찌그러진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힘을 준다. 그들은 닫힌 이야기 속에서 그들대로 살아가고, 나도 나대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별로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