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일
약 봉투에 다음 병원 방문 날짜가 2주 뒤로 적혀 있길래 잘못 본 줄 알았다. "약 2주 치예요?"라고 물으니 간호사 선생님이 맞다고 했다. 만 원 조금 넘는 진료비와 약값을 내고 어리둥절하며 병원을 나섰다. 지난번에도 2주 치를 받기는 했지만, 그건 병원이 연휴 중 하루인 토요일에 쉬어서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충 내 상태가 많이 안정되었고, 그래서 전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경과를 볼 필요가 없나 보다 멋대로 생각했더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내가 다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불필요한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하는 조언도 남들에게는 시시하게 들릴 법한 것들뿐이다. 우울 삽화 기간에 무기력증이 너무 심했을 때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라고 했고, 조금 나아졌을 때는 조금씩 운동 같은 것도 시작하라고 했고, 뭐 그 정도다. 추측컨대 그 불필요한 말에는 내가 앓는 병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왜 2주 치 약을 주었는지 알려 주는 것도 포함되었지 싶다.
정신병도 스펙트럼 같은 거라서 구분을 딱딱 지을 수 없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은 철저히 내 증상만 보고 약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굳이 알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런 의사 선생님의 요즘 관심사는 내가 경조증이 훅 올라와서 뻘짓을 하지는 않는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요즘 새로운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 "너무 에너제틱한 건 아니에요?"라고 심각해하면서 조금 웃었다. 일전에 경조증 삽화가 올라왔을 때(진료 시간에 상태를 설명하는 말을 빌리자면 '지나치게 들떴을 때') 6000자짜리 글을 앉은자리에서 2~3시간 만에 쓴 적이 있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약속을 잡고 폭음을 하거나 카페인 음료를 두 통쯤 들이켠 기분으로 싸돌아다니거나 하지 않는다.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부지런하게 지내고 있다. 경조증 상태가 좋았던 적은 그게 병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뿐이었고, 나야말로 내가 뻘짓을 하지 않는지를 가장 많이 단속하는 사람이다. 경조증 삽화 기간에는 아무리 늦게 자도 오전 6시 전에는 눈이 떠지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매일 오전 7시 반에 뭉그적대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는 약 부작용도 많이 가셔서 일을 할 때도 별로 문제가 없다.
너무 들뜨지 않게 스스로를 단속할 때를 제외하면 평온하게 살면서, 바람직하게도 병증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너무 먼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매일매일 그날의 마감을 할 때처럼, 조금 먼 시점에 마감 일정이 잡혔다는 기분으로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아, 저녁 약은 다시 원래대로 줄였다. 수면 문제가 정신과적 문제가 아니라 수면 환경의 문제였다는 걸 갖은 시도 끝에 깨달았더니 나도 선생님도 맥이 좀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