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5일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였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일거리가 몰아치는 오후를 보내느라 하마터면 놓칠 뻔한 메일 하나를 옆팀 선배에게 전달받았다. 별 이유도 없이 퇴근도 못 하고 동동거리면서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게 헛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라, 메일을 받자마자 갑자기 모든 게 막막해져서 5초쯤 굳어 있다가 겨우 기사를 썼다. 무사히 송고되고 나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울화가 치민다는 이유로 50만 원쯤 하는 새 이북 리더기를 사 버렸기 때문에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려는 생각은 고이 접었다. 플라스틱 그릇을 씻어서 배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죄책감과 귀찮음이 나를 스멀스멀 덮치는 것만 같기도 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서 냉동실에서 얼어 죽어 가던 식빵 두 쪽에 바질 페스토를 바르고 치즈를 끼워서 대강 구웠다. 에어프라이어가 돌아가는 동안 라디오를 켰다. 마침 FM실황음악이 시작할 때였고, 윌리엄 보이스 교향곡 1번 1악장 초입부를 들으며 반쪽은 지나치게 구워지고 반쪽은 척척한 야매 토스트를 철근같이 씹어 먹었다. 그런데 어머나, 내가 멘탈이 나간 건 어찌 알고 바흐를 선곡했는지. 뚱땅거리는 피아노로 편곡된 토카타와 푸가를 듣다가 갑자기 흥이 났다. 마음의 고향인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흐 칸타타 BWV140을 거쳐서 다시 윌리엄 보이스 교향곡을 듣고 있다.
사람은 대체로 끼니를 잘 챙겨 먹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좋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