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0일
우울증을 다시 앓고 나니 사람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사람을 만나서 휴대폰 급속 충전을 하듯 힘을 얻고 일을 하는 나날을 보낸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회복기를 가진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던 터에, 이런 날들을 무척 신기하게 여기고 있다.
오전에는 거진 시체처럼 지낸다. 오전 7시에 천근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린 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 출근하고 일을 하다가, 점심에 사람(주로 취재원)을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기자라는 직업의 장점은 일 핑계를 대면서 점심시간이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급속 충전의 효과가 썩 오래가지는 않기 때문에, 오후에는 또 일하는 시체처럼 마감을 하다가 중간중간 담배 친구들과 담배를 한 번씩 피우러 나가서 또 충전을 한다. 마감을 하고 나서도 친한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올 때가 많다.
재발 초기에는 주로 친구들이 날 바깥으로 끌어내 주었는데, 요즘은 내가 알아서 밖에 기어나가서 사람들을 두루 만나고 있다. 병이 좀 나아지고 나니 전보다 우울증을 캐주얼하게 오픈하기도 쉬워졌다. 보통 아무리 친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리라 해도 "우울증 때문에 반 년째 약 먹고 있어"라고 하면 약 2~3초의 '갑분싸 타임'이 찾아오곤 하지만, "나 코감기 걸려서 감기약 타 먹었더니 졸려 죽겠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면 혼자서 괜히 즐거워한다. 어제는 저녁밥 먹고 약을 꺼냈더니 콩알 반쪽만 한 알록달록한 약들을 본 일행이 "약이 귀엽다"고 해서 조금 웃었다.
세 끼 밥과 약을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는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으려니 지난 2주도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의사 선생님한테도 그렇게 얘기했다. 신중한 우리 의사 선생님은 내 차트에 '별일 없었음'이라고 적고 "별일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예요"라고 하더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네요"라고 말하면서 또 약 2주 치를 처방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