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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Nov 04. 2021

4000만 원의 쓰임새

나도 잊고 있던 미래의 행선지

    "너 꿈은 좀 바뀌었어? 4000만 원 모은다며?"


    뚱딴지같은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4000만 원이라니, 연차가 제법 찬 직장인이 목표로 삼을 저금액으로는 너무 소박(?)하게만 들렸다. 알고 보니 내가 예전에 "선배, 저 늙으면 4000만 원 모아서 스위스에 안락사하러 가려고요" 따위의 말을 했던 모양이다. 선배가 우리 회사에 다녔던 때 나는 20대였는데 정말 별 얘기를 다 했었다. 깔깔 웃으면서 "그보다는 서울에 등기 치는 게 훨씬 건전하지 않나요? 다주택자 임대사업자가 될 겁니다"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선배도 마주 웃으며 "다행이다. 너의 꿈을 힐난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 염세적인데?'라고 생각했었어"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스위스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즈음해서의 나도 좀 제정신은 아니었다. 부서에서 영 적응을 하지 못했던 탓에 일이 조금, 아니 많이 힘들었다.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기자가 되었는데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하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예정된 죽음뿐이었다. 마음 한편에 '막 살다가 죽지 뭐'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불순물이 조용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우울증이 재발할 씨앗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걸 파내 버리지 않고 몇 년간 찍어누르며 그럭저럭 쓸 만한 조직의 부품으로 살려고만 애써 왔으니, 기어이 마음이 고장나 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제 더는 먼 날로 예정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죽기 전 뒷정리는 어떻게 할 지, 휴대폰의 잠금장치를 미리 다 풀어 놓을지, 왜 굳이 꾸역꾸역 살아야만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바투 다가온 앞일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내일 아침으로는 무엇을 먹을지, 출근길에는 무엇을 입고 나갈지, 화장실 청소와 분리배출과 설거지는 언제 하면 좋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우울증에 걸리기 전의 나는 이렇게 살았었구나, 그런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산다.


    통원 초기에 의사 선생님에게 "잔잔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평정심에 조금 더 가까워진 날들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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