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별일 없었고요, 적당히 게으르게 지내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진료의 탈을 쓴 만 원어치 수다를 좀 떨다 왔다. "회복 탄력성이 좀 강해진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고 말을 이어 나갔다. "휴가 갔다 돌아오니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마구 내리 꽂히더라고요.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벌어야 돼?'라면서 화도 나고 우울하기도 했는데, 한 이틀쯤 그러다가 그냥 공부하는 셈 치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담담하게 일상생활을 잘하는 것 같네요"라면서 또 약 2주 치를 처방해 주었다. 현대 정신의학의 힘이 가져다준 괄목할 만한 변화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불안했을 때, 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축축하고 흐늘흐늘해진 티슈를 온통 쥐어뜯으면서 줄줄 울고 있었다. 나보다 입사 준비를 늦게 시작한 스터디원들이 하나 둘 차례로 언론사에 최종 합격해 나가는 동안, 글을 곧잘 쓴다는 평가를 듣던 나는 제자리에만 머물렀다. 백수 생활이 2년째에 접어들 위기를 맞고 있었다.
수 차례 서류전형에서 고배를 마신 끝에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언론사 입사 준비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던 회사의 카메라 테스트와 실무 면접을 앞뒀을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덜덜 떨려서 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과에 가긴 했는데, 그때 내가 병원을 얼마나 다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의사의 지도를 받지 않고 멋대로 단약을 했을 것이다. 면접은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 눈이 붓도록 울었다.
또 다른 언론사의 최종 면접일은 내 생일 다음날이었던가, 그랬었다. 아니면 실기 전형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때도 내가 다가올 채용 전형에 대한 불안감에 잡아먹혔다는 것이다. 살면서 가장 우울했던 생일이었다.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잠을 자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참 빨리 갔다. 그 회사도 결국 떨어졌다. 거의 1년이 다 지나서야 지긋지긋한 백수 딱지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일하는 중간중간 죽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했던 것 같은데, 병증이 뿌리 뽑히지 않고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못 했다. 미래가 어떤 장막에 가로막힌 듯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막막한 감정에 사로잡힐 정도는 되어야만 병이라고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의 나는 꽤 즐거웠다. 꿈꾸던 직업도 가졌고, 월급은 다달이 통장에 잘 꽂혔고, 머릿속에서 남은 예산을 맹렬하게 계산해 가며 조금 더 싼 편의점 도시락을 고르지 않아도 됐고, 돈을 차곡차곡 모아 해외여행이라는 것도 난생처음 다녀왔다. 무엇보다도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부양할 수 있다는 감각이 꽤 달콤했다.
그래서 "나 우울증 되게 심했는데, 돈 버니까 저절로 낫던데?" 같은 시건방지고 철딱서니 없는 말을 나불댈 수가 있었다. 어디서 스치듯 본 조사 결과에서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30%밖에 안 됐다고 하던데, 내가 나머지 70%의 응답자 짝이었다. 정말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병에 대한 민감도가 좀 더 낮았더라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죽고 싶다든가, 딱히 오래 살고 싶지 않다든가, 삶에 의미가 없다든가 하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바꾼 약이 잘 들어서 내원 간격이 1주에서 2주로 늘고 나니 좀 알겠다.
그러니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를 편하게 가까이하면 좋겠다. 우리는 다들 너무 힘들게 살기 때문에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른다. 아플 때는 병원에 가야 한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