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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Nov 17. 2021

'갓생' 같은 소리 하네

징그러운 정상성 신화

    언제부터인가 흔하게 쓰이는 '갓생', '갓반인' 같은 말을 볼 때마다 징그러워서 소름이 쭉쭉 끼친다.


    '갓-'은 화자가 어떤 개념을 두고 다른 비교군보다 아주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 단어 맨 앞에 붙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갓생'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 정도로 풀어서 쓸 수 있다. 만약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라면 성적을 만점에 가깝게 유지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각종 '스펙'을 쌓는 데도 열심이고, 그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도 공을 들이는 이를 두고 "갓생을 산다"고 할 것이다.


    뭐가 더 있기는 할텐데, 아무튼 '남들이 볼 때'에 "얘는 참 알차게 사는구나!"라는 공감을 두루 얻을 만한 삶의 방식 전반을 '갓생'이라고 정의한다면, '갓생'을 논할 때 자주 따라오는 말에는 '갓-'과 '일반인'을 합성한 '갓반인'이 있다. 주로 대중적으로 너른 이해를 받지 못하는, 서브컬처를 하드하게 향유하는 집단의 구성원이 내집단을 자조할 때, 혹은 서브컬처 향유자들을 비하할 때 흔히 쓰인다. "갓반인들은 이런 거 모르거든?", "탈덕하고 갓생이나 살러 가" 같은 식의 예를 들 수 있겠다.


    내가 징그럽게 느끼는 지점은 '갓반인'과 '갓생'이라는 말의 배경에 버티고 선 정상성 이데올로기다. "자신을 위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방식을 찾자"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기준에 걸맞지 않는다는 자격지심과 자기혐오에 아주 푹 절어 있을 때나 숨 쉬듯 쓸 법한 말들이다.


    위에도 예를 들어 놓긴 했지만, 한국인의 정상성이라 함은 △외모가 아름다울 것 △특히 과체중이 아닐 것 △성적이 우수하거나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을 것 △누구나 이름을 알 만한 정규직 형태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것 △일에 매몰되지 않고 여가를 즐길 줄 알 것 △여가 활동조차도 자기계발 혹은 수익 창출에 보탬이 될 것 △그 와중에도 능력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 △어떤 집단에서든 모나지 않고 잘 지낼 것 △'이성교제' 끝에 '정상가정'을 이루고 혼인·임신·출산·육아를 하고 있을 것 등이 있을 것이고…… 줄줄이 적어 내려가다 보니까 조금 역해져서 그만해야겠다.


    위에 나열한 바와 같은 삶의 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다. 예컨대 '사회성'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는 능력'은 남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꼭 필요할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이라는 무리동물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부분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내향성을 가지고 태어난 데다 우울증이라는 고질병을 앓는 나도 평상시에는 필사적으로 사회적인 인간을 연기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남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게 예의라는 것이니까.


    다만 '저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않는 너는 비정상인'이라는 공고한 사회적 믿음이, 그 이전에 사람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가야 사회 구성원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정상성 신화'가 역하다. 서로 적당히 예의를 지키면서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마음대로들 살면 되지, 대체 왜 그렇게들 남이 사는 모양에 관심들이 많을까.(글 전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는 여담이지만, 정상성 신화에 대한 반동으로 평범성을 들입다 깎아내리는 것도 흉하기는 마찬가지…….)


    제각기 다종 다양한 페널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녹아들도록 다 같이 돕지 않고, 단 하나의 틀에 사람을 억지로 구겨 넣고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내려는 시도들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자꾸 쓸데없는 오지랖들을 부려 대니까 사람들이 남의 눈치만 살살 보다가 결국 마음에 병이 든다.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는 젊은 여성들은 살을 빼기 위해 마약성 식욕억제제와 이뇨제, 변비약 따위를 한 주먹씩 털어 넣고 부작용에 시달리고, 학업과 취업 스트레스에 짓눌린 학생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일과 육아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 내려는 엄마들이 자괴감에 시달린다.


    사람은 보통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고 화를 내지도 않는다. 내게도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부분이 많다. '결혼 적령기'(정말 싫어하는 말이지만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라고 불리는 나이에도 결혼이 인생의 우선순위 상위에 있지 않아서, 아이가 있는 친구에게는 종종 농담 삼아서 "○○이한테 내가 '결혼 안 한 괴팍한 이모'의 롤모델이 되어 줄게"라고 말한다. 이렇게 아무리 반골인 척해봤자 나 역시 한국 사회의 정수를 뒤집어쓰고 있다. 몇몇 지점에서 나름 균열을 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순응하거나 체념하는 부분도 많다. 그래서 정상성 신화에 더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각자 기준에 맞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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