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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Nov 18. 2021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기

말은 사고를 지배한다

    '죽고 싶다', '자살각이다', '망했다', '자살 말린다' 같은 말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한 지가 몇 년 됐다.


    어떤 종류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산 지 최소 20년이 넘었고, 한때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자조하는 태도가 쿨하다고 여긴(대체 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꾹 참는 것이 무척 어색했다. 그러나 온갖 부정적인 사고를 툭툭 뱉지 않게 되니 "젊을 때 열심히 돈 모아서, 늙으면 안락사하러 스위스나 벨기에에 가겠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다.


    '자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이의 심리를 모르지는 않는다. 나를 포함한 위아래 세대들은 삶이 지금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을 받기보다는 나빠질 거라는 신호만을 받으며 살아왔다. 유년기나 청소년기, 사회 진출 시기에 각종 경제위기를 직격탄으로 맞으며 절망을 온몸으로 느낀 경우가 숱하다. 밑도 끝도 없는 청춘예찬이나 '노오력'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들의 하나마나한 충고나 훈계에 염증을 느끼고 염세적인 태도를 띠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과 그럼에도 더 나은 삶을 꾸리는 것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병 없이 단명하는 게 꿈이라든지, 자살만이 살 길이라든지, 이런 말들은 농담으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사고를 지배한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의욕 자체를 스스로 꺾어 버릴 수 있다. 그런 태도가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까지 은연중에 전염되도록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결코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한때 자살은 생을 택할 수 없는 인간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선택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를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존엄사를 논외로 한다면, 자살은 스스로에게 해를 끼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하는 행위다. 과연 행복 추구권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한 뒤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부의 고통과 신경전달물질의 교란에 떠밀려 삶을 끝내고자 하는 것은 온전한 내 선택이라 할 수 없다. 우울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과 나의 감정은 모두 내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는 내게 달려 있다.


    긍정론을 말하다 보니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모 교수가 된 것 같다. 현실이 거지 같아도 마취제를 놓으면서 착취와 부조리와 분노를 참아 내자는 것이 아니다. '머리에 힘을 줘서 우울증을 이겨내자' 같은, 우울증을 털어 놓으면 무례한 사람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무책임한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한때 자살사고에 심각하게 매몰돼 있었고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정말 진심으로, 살아 있으면 좋은 날이 온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처지가 180도 달라져서 꽃 같은 날들만 찾아온다는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약물과 상담의 도움을 받고, 자기 효능감을 끊임없이 발굴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어깨를 나눠 주다 보면, 거지 같은 일들을 견디고 조금씩 바꿔 나갈 힘이 생긴다. 그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면 좋겠기에, 우울의 얼굴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려 한다. '마음의 감기' 같은 레토릭에서 조금 더 나아갈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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