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다 잘못했고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인데, 십여 년을 먹구름처럼 드리워서 걷히지 않던 우울함이 그걸 찍어 누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종종 한다. 내성적/내향적이기는 하지만 외부 세계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 치료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내 인생에서 가장 쾌활하게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이게 경조증 삽화에 딸려 오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는 확신도 굳히게 됐다.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에 팀에 막내가 들어왔다. 이 회사가 첫 직장이고, 여기가 첫 부서다. 야무지고 싹싹해 보이기는 하는데, 첫 부서로 발령을 받았을 때 내가 느꼈던 낯섦과 막막함을 떠올리면, 옆에서 적응을 도와줄 만한 동성 선배가 한 명쯤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수습 딱지를 갓 뗐을 당시, 간만에 들어온 저연차의 어린 후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을 모르던 선배들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감히 요구할 생각도 하지 못했고, 스스로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동동거리기만 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내가 과거에 받고 싶었던 것을 타인에게 주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형국이었지만, 아무튼 재사회화 및 우울증 치료 과정에서 기른 사회성을 닥닥 긁어 모아 막내에게 열심히 말을 붙였다. 그랬더니 술자리에서 부장이 "둘이 전에 아는 사이였어?"라고 물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제가 노력해서 기른 붙임성이 빛을 발했다는 증거겠죠!"라고 했더니 (나름 애정이 섞인) 핀잔을 들었다.
게다가 사람들과 무리 없이 어울리고 싶어하는, 사회화 과정에 있는 내향인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막내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저녁밥을 사 먹이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라서……."라고 했더니 막내가 "선배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래에는 "선배가 팀을 옮기시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요"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외향인에게 간택당해 친구가 되는 썰' 같은 걸 보면서 부러워하기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도 어느새 남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친밀해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됐다. 아니면 서두에 적은 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과거에는 우울함에 짓눌린 나머지 내면세계에 갇혀 허우적대기만 하느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후자 쪽의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보현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요?"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격려는 이런 것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저 말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으려고도 한다. 나는 원래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