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흰빛 복상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며 흐드러지게 핀 봄날, 지인에게 꽃 화분 하나를 얻어왔다. 지인이 가꾸는 온실에 들렀다가 흰색 꽃잎이 사틴처럼 두텁고, 향기가 치자꽃처럼 화려한 녀석을 봤다. 온실 한편에 커다랗게 자리를 딱 잡고 꽃을 피우고 있는데 매혹적이라는 말을 이때 쓰는구나 싶었다. 꽃 이름은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사실 지인도 대충 얼버무리며 알려줘서 신뢰도가 하락한 상태였다.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했었다.
나무 세 포기를 예쁜 황토 화분에 담고 흰색 자갈도 올려두니 나름 있어 보였다. 꽃망울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이제 꽃만 피면 된다. 베란다에 갈 때마다 이제나 저제나 꽃이 필까 마음이 달았다. 2주, 3주, 한 달이 지나도 좀처럼 꽃을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가 잘 못 되었나. 물이 부족한가 햇볕이 부족한가. 들여다볼 때마다 늘 그 상태였다. 변화도 없고 뭐 재미도 없고 점차 신경에서 멀어졌다. "꽃망울이 필 땐 물을 많이 줘야 돼" 지인의 충고는 잊어버렸다.
한동안 바쁘게 지내다 보니 겨를이 없었다. 밥을 먹다 문득 녀석이 궁금해졌다. 이제는 꽃을 피웠나 어쨌나. 아뿔싸. 문제가 생겼다. 주렁주렁 달렸던 꽃망울이 형태만 그대로였지 죄다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두텁고 반질반질하던 잎사귀도 바짝 말라 있었다. 그간 나뿐만 아니라 집에 어느 누구도 물을 주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흙이 강모래처럼 바삭거렸다. 급하게 물을 떠다 부어주었다. 들이킬 여력도 없는지 부어주는 족족 물이 화분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다. 어째야 하나 이거. 원래도 화초 키우는데 소질이 영 없었다. 이미 꽃망울도 맺혔겠다, 워낙 튼실하고 건강해 보여서 데려왔는데 이렇게 말라 시들어 버릴 줄은 몰랐다. 줄기도 이미 뿌리를 향해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회생이 쉽지 않아 보였다.
온실에서 겨울에도 따뜻하게 바람 한 점 없이 곱게 자라던 녀석이었다. 봄날이라지만 패딩을 꺼내 입어야 했을 만큼 차가운 공기가 낯설었을 게다. 추웠다 더웠다 어디에 장단을 맞출지 정신 못 차렸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일 물을 조금씩 주고 지켜볼 뿐이었다.
갑자기 낮 기온이 30도를 넘었다. 올 여름 어쩌려고 이러나 싶을 만큼 더위는 불쑥 찾아왔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화분을 옥상에다 내놓고 햇볕을 쬐게 하면 온실만큼 덥지 않을까. 얼른 옥상 한편에다 화분을 데려다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가지에 물을 담아 올라가 안부를 묻는다. "잘 잤어? 어젯밤에 안 추웠어? 물 먹고 쑥쑥 자라라" 문안인사를 건넨다. 낮이나 밤에도 수시로 들러 한 번씩 쓰다듬어 준다. 거미줄도 치워주고 잡초도 솎아준다. 그러다 오늘 아침 두 녀석이 막 피우려고 준비중인 새싹을 발견했다. 드디어 살아나는구나. 어깨춤이 덩실덩실나왔다.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생명이 피어나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기분이 참 흥겹다. 살아 있는 생명체란 뭐든 애정과 관심을 꾸준히 쏟아줘야 하는구나. 내 안으로만 향하는 시선을 이제는 밖으로도 조금씩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가지에 물을 찰랑찰랑 담아 들고 옥상으로 껑충껑충 올라간다.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는 녀석들에게 마음을 다해 당부했다. 살아나라, 살아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