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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l 22. 2020

집주인 아지즈벡 이야기

임대인과 임차인의 전쟁 그리고 뜻하지 않은 평화

[우

드디어 이사할 집을 찾았다

온갖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시작했던 '현지 생활 적응 프로젝트, 현지인 집에서 하숙하기는' 두 달만에 막을 내렸다. 막상 하숙집을 나오기로 결정은 내렸지만 또다시 집을 구하는 게 골칫거리였다. 어차피 원활한 전기, 수도, 가스 공급은 언감생심 욕심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해야 살지 않겠는가. 하숙집 계약 종료는 사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 살집을 구하지 못했으니 여차하면 길에 나앉을 판이었다.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졌다. 


지난 보름간 학교 동료 선생님들, 지인 인맥을 총동원해 학교가 위치한 아사카 시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땡볕에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 봐도,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살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실망이 거듭되고 더위에 지쳐버려서 될 대로 돼라 싶은 심정이었다.

마지막에 들른 집은 닭들이 마당에 뛰어놀고 있는 그야말로 다 쓰러져가는 1층짜리 허름한 주택이었다. 화장실은 당연히 재래식이었고 그마저도 닭들이 통로를 점령하고 있어 저 닭 무리들을 모조리 후달겨내야만 화장실 출입이 가능해 보였다. 어떻게든 아사카에 남고 싶었던 나는 그곳에서 살아볼까 어쩔까 집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진지하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마당에서 닭 모이도 주고 같이 놀아주면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집주인들도 사람이 좋아 보여서 우즈베크어도 배우고 겸사겸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보고 같이 집 구경을 간 동료 노디라 선생님이 질색팔색을 했다. 어설픈 살림살이도 문제였지만 담벼락도 제대로 없는 1층 집인지라 무엇보다 안전 문제상 살면 안 된다고 조언하고 나섰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집을 보는 나의 눈높이는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었다. 극구 만류하는 노디라 선생님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아사카의 마지막 집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안디잔에 되돌아올 계획이 없었던지라 괜찮은 월세 아파트가 있다는 제안도 다 뿌리친 마당이었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안디잔이든 어디든 일단 볼 수 있는 집은 모조리 보러 가야 했다. 거절했던 사람의 연락처를 다시 수소문해서 일전에 말한 그 집 좀 보여주십사 부탁을 했다.

소개받을 집은 안디잔에서 아파트가 가장 밀집해 있다는 5번가에 위치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니 비로소 일전에 여기 와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즈베크에 갓 파견되었을 때, 5번가에 살던 A단원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겠다고 여섯 명이나 모여들었는데 여느 때처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들 희미한 촛불과 손전등에 의지해 밥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난방이 안 되는 실내공기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설거지를 자청하고 나섰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화들짝 놀라 손을 호호 불어야 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나오니 밖은 더 깜깜했다. 춥고 어둡고 황량하고, A단원은 웬만하면 5번가에다 집을 구하지 말라는 조언을 남긴 채 두 달 뒤 귀국길에 올랐다. 그럼 그렇지, 여기라고 별거 있겠나. 집에 대한 기대치는 이미 바닥을 치고 지하로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낮에 본 5번가 아파트 단지 규모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단지 내엔 초중학교도 있고, 끄트머리엔 고등학교까지 위치해 있었다. 내가 구경할 아파트는 단지 입구 쪽에 있어서 멀리 걸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기다란 아파트 동을 따라 걷는데 페인트칠도 그렇고 건물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의외였다.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는데 어라, 이 정도면 청소 상태도 괜찮은데. 게다가 3층이라니 로열층 아닌가.

아파트 현관문은 새것처럼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인테리어를 한 지 얼마 안 된 듯, 벽지도 산뜻하고 집이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깔끔했다. 주방, 욕실, 거실 그리고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볕도 잘 들고 가구도 다 새 거처럼 보였다. 주인 말로는 물도 잘 나오고 전기사정도 나쁘지 않으며 가스까지 종종 나온다고 했다. 안디잔에서 삼위일체, 이 모두를 갖춘 집을 만날 확률은 1% 아니 0.1%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5번가 옆으로는 아사카행 버스가 지나다니고 있어 통근하기에도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별로 탈 일은 없겠지만 안디잔 공항마저 코 앞에 위치해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지붕만 있어도 좋겠다 했었는데 지금껏 봐온 어떤 집보다 근사한 아파트를 만난 것이다. 게다가 비어 있으니 당장이라도 이사를 들어오고 싶었다. 일단 집은 완전 오케이,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감당하기엔 아파트 월세가 너무 비쌌다. 이제 본격적으로 집주인과 협상에 들어갈 차례였다. 나는 흡하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이 집에 살게 좀 해 줘요 아지즈벡

집주인은 귀금속 가게를 운영하는 비즈니스맨이었다. 턱수염이 북실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게, 한눈에 봐도 까탈스럽고 흥정에 도가 튼 실크로드 상인의 후예였다.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아우라가 풍겨 났다. 집주인은 집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주인은 이 정도 스펙이면 월세로 최소 400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사실 이건 외국인용 금액이고, 현지인들은 대개 100~150달러 내외면 아파트를 임차해서 살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외국인이다. 아저씨는 영리하게도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뒤, 외국인들을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아무리 쥐어짜고 어째고 해 봐야 내가 월세로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최고 300달러에 불과했다. 주인은 택도 없다는 듯, "400달러도 네가 좀 오래 살 거라니까 특별히 싸게 주는 거야. 터키 비즈니스맨들한테는 500~600달러씩 받던 곳이라고." 안디잔에 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간이 출장 온다는 터키 비즈니스맨들은 주로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씩 호텔이나 아파트를 단기 임대해서 살았다. 당연히 임대료가 올라갈 수밖에. 집주인은 월세를 깎아줄 의사가 없음을 단호히 내비쳤다. 사흘 뒤면 하숙집에서 쫓겨날 신세인 내 사정도 절박하기로는 못지않았다. 나는 집주인 설득에 들어갔다.

"고액으로 단기 임대하면 뭐 해요, 일 년 중 절반은 집 비워두잖아요. 아니라고? 에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이게 무슨 일주일 비어있던 집이야. 지금 여기 한 번 봐봐요. 여기, 창틀에 먼지 쌓인 거 보니까 한 달은 족히 비어 뒀구먼 뭐." 나는 주방 너른 창틀 아래 낀 먼지를 놓치지 않았다.

"아저씨, 나는 최소 1년은 살 거니까 월세가 꾸준히 들어오잖겠어요? 나는 오늘 당장이라도 이사가 가능합니다. 세입자 구하는 것도 사실 신경 쓰이는 일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들어올지 누가 알아요? 세입자 구할 걱정 없겠다, 일 년 동안 따박따박 월세 들어오겠다. 단기 임대하느니 좀 저렴해도 차라리 장기임대로 꾸준히 월세 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 다급함에 혀가 길어진 나는 청산유수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내 우즈베크어가 이 정도 실력이었나 스스로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현지인 집에서 하숙한 보람이 그래도 없진 않았다.

임대를 안 하면 안 했지 월세를 깎아줄 수 없다던 아저씨의 단호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이 신분증. 나는 한국 정부랑 우즈베크 정부가 신분 보장을 한 사람이에요. 따로 거주지 등록도 필요 없다니까요. 나보다 믿을 만한 외국인을 안디잔에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걸요."

코이카 단원은 준외교관 신분으로 관용여권을 발급받아 소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즈베크 정부는 코이카 단원에게 면책특권이 명시된 국내용 신분증도 따로 발급해 주었다. 독재국가인 우즈베크에서 공권력의 힘은 막강했고 외국인들은 거주지 이전에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아예 대놓고 아저씨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 집에 냄새 밸 일이 없잖아요. 그 터키 비즈니스맨들 담배 엄청 피워댔죠? 게다가 나는 술도 안 마셔요. 비록 무슬림은 아니지만 술도 안 하지 담배도 안 하지 참 경건한 습관 아닙니까. 친구요? 아아 걱정 마세요, 제가 친구가 어디 있어요. 여기 올 사람이 없어요. 저는 그저 조용히 공부하면서 혼자 지낼 거예요. 제가 또 워낙 깔끔해야지요. 청소 자주 할게요 아저씨!" 나는 혀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말을 마구 마구 던져댔다. 아파트에 대한 아저씨의 공고한 자부심과 애정을 공략하며 나는 마무리 발언까지 마쳤다.

말이 끝날 즈음에 나는 아저씨가 안디잔에서 만날 수 없는 최고의 세입자로 둔갑해 있었다. 솔직히 과장은 좀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아저씨는 썩 탐탁지 않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끝내 월세 300달러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앗싸.

나는 여세를 몰아 요구조건을  덧붙였다. 월세를 3달치씩 한꺼번에 줄 터이니 전기료, 수도세, 가스비, TV수신료까지 월세에 포함시키기로 말이다. 아까도 말했듯 혼자 사는 거라 관리비가 얼마 안 나올 거라는, 사실 나도 모르는 근거를 대며 아저씨를 안심시켰다. 아저씨는 홀린 것처럼 내 조건을 100프로 수용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집 구경부터 계약까지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마침내 집 구하기 대장정이 끝이 나고 나에게도 보금자리가 생겼다.


외모는 산적 취향은 분홍공주, 집주인 아지즈벡

집을 보러 간지 사흘 만에 일사천리로 이사까지 마쳤다. 첫 방문이자 집 계약 날에는 그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나, 전기랑 가스는 들어오나 어쩌나에만 정신이 팔려 집안 인테리어 따위에 꼼꼼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사를 하고 다시 집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온통 분홍색 일색이었다. 그냥 분홍색은 아니었고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분홍색이었다.

특히 인상 깊은 건 침실이었다. 벽지는 옅은 분홍색, 두꺼운 커튼은 진분홍, 카펫은 살구빛 분홍, 이불도 장식장도 분홍분홍 천지였다. 이건 분홍 엄지공주를 위한 방이 틀림없었다. 전등마저 붉그스레한 분홍 빛을 뿜어내는 게 앉아 있으면 정신이 휘황해지는 감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부담스러운 인테리어였다. 나는 침실에는 잠잘 때만 불도 켜지 않고 들어갔다가 날이 밝음과 동시에 얼른 빠져나왔다.

이 분홍 취향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집주인이라는 게 상당한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집주인 이름은 아지즈벡, 서른 후반이었는데 우즈베크에서 흔히 그렇듯 실제보다 10살은 더 들어 보였다. 사실 사람 이름 뒤에 붙이는 '~벡'은 '~씨, ~님'과 같은 존칭어이다. 그러니 "이름이 뭐예요?" "네 제 이름은 아지즈님입니다" 하는 꼴이었다. 남들이 이름을 부를 때 따로 존칭을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경을 표하게끔 우즈베크의 부모들은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곤 했다.

아지즈벡은 처가의 재력을 발판 삼아 터키를 오가며 금붙이 사업을 하고 있었다. 터키에 자주 간다는 걸로 보아 돈을 톡톡히 버는 모양이었다. 우람한 체구, 북실북실한 털, 흡사 산적을 연상시키는 우락부락한 외모의 아저씨는 알고 보면 분홍색과 로맨틱 드라마를 좋아하는 반전이 있는 사람이었다. 위로 누나만 다섯이라더니 취향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지즈벡의 집에 대한 애착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집을 보러 온 날, 수세미를 잡고 싱크대를 문지르고 있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귀한 공주님 딸을 시집보내는 딸바보 아버지들이 저럴까. 세를 주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처럼 집에 관한 한 여간 까다롭고 도도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일전에 미국인한테 임대를 준 적이 있었거든. 요기 와봐 요기 요기. 이거 보이지? 그래 벽지에 이 자국. 도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 그 미국 양반이 요리를 한답시고 벽지에 이렇게 얼룩을 남겼다니까. 얼마나 흉하냐고 이게 이게. 당연히 그 미국인에게 도배 비용을 청구해서 받아냈지."

그러고 보니 나지막한 냉장고 위쪽 벽지에 좀 더 진한 색깔로 점이 한 다섯 개 정도 찍혀 있었다. 기름이 튄 모양이었다. 고개를 처박고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잡티였다.

"절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벽지를 더럽혀서는 안 돼." 크고 시커먼 눈을 부릅뜨고 아지즈벡은 나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미국인에게서 도배할 돈을 받아 내고도 새로 도배를 하지 않았다. 아지즈벡은 내 예상보다 훨씬 예리하고 날카롭고 섬세하고 그리고 이해득실을 정확히 따지는 성격임에 틀림없었다.

많은 한국인 봉사단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지인 집주인과 갈등이 있어도 부딪치기 싫어서 적당히 참거나 아예 참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부당하다 생각되면 째깍째깍 의의를 제기하고 항의하는 게 다반사였다. 초반부터 나의 험난한 세입자 생활이 어느 정도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지즈벡과 나는 번번이 사사건건 부딪쳤다.


나 몰래 다녀가는 집주인과 한바탕 싸움이 났다

집주인 아지즈벡과 나의 마찰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아지즈벡은 집을 너무나도 아낀 나머지 내가 없는 틈을 타 집에 들어와 보곤 했다. 그날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의 물건 위치가 살짝살짝 바뀐 게 느껴졌다. 아이 진짜 이 아저씨 또 이러네. 나는 씩씩대며 쏜살같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캬 (aka, 남성 존칭어로 아저씨 정도의 의미), 오늘 나 없을 때 집에 들어왔었지? 아 왜 사람이 없는 집엘 맘대로 들어오냐고요!"

이러면 집주인 아지즈벡과 나의 싸움이 땡 하고 시작되었다. 아주 레퍼토리였다. 아지즈벡이 깐깐한 만큼 나의 깐깐함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저씨는 임대했어도 '나의 집'이니 내 맘대로 들어가 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나는 절대 안 된다, 엄연히 월세를 내고 살고 있는 한 이 집은 내 구역이고 반드시 내 허락을 맡은 후에야 들어갈 수 있다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사실 이 문제는 우즈베크 현지인 집주인과 외국인 세입자 간에 빈번히 일어나는 갈등이었다. 집주인들은 세를 주어도 그 집이 당연히 자신의 관리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입자가 없을 때를 틈타 집이 어떻게 깨끗한가 더러운가 집 상태를 둘러보며 점검했다. 몰래 들어온 집주인에게 거실에 나뒹구는 술병이며 담배꽁초며 정돈 안 된 집 꼬락서니를 목격당한 한 코이카 단원은 불같이 화가 난 집주인에게 그 길로 쫓겨나 버린 일화도 있었다.

나는 현관문에다가 소리가 요란한 방범 장치를 설치했다. 누구라도 나의 허락 없이 밖에서 현관문을 열었다가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불쾌한 소리에 놀라  심장이 덜컥할 것이다. 당연히 집주인 아지즈벡에게는 방범장치 끄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의 즉각적이고 잦은 항의에 넌덜머리를 느낀 탓인지 아지즈벡이 약간 조심하기는 하는 눈치였다. 집에 들를 일이 있으면 마지못해도 어쨌든 나에게 미리 연락을 해 왔다. 그러면 나 역시 마지못한 척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물론 이 평화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아지즈벡과 나의 갈등이 최고에 달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 번은 방학중 일주일간 휴가를 얻어 집을 비우고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집주인에게 알리면 나 없는 사이 뻔질나게 집에 들어와 볼 게 뻔할 뻔자였다. 일부러 한 마디 언질도 없이 나는 조용히 집을 떠났다.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시나 누군가 들어왔던 흔적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가. 나에게 연락 없이 절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휴대폰 전파가 잘 터지는 집 앞 공터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씩씩대며 당장 아지즈벡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캬, 나 없을 때 집에 들어왔었지?"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아지즈벡은 사전 고지 없이 집을 장기간 비운 나를 탓했다. 인근 3번가 아파트에서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나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아저씨는 내가 전화를 안 받자 학교까지 찾아가 수소문을 했고 휴가 갔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가스 점검차 집에 들렀던 거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듣고 보니 아저씨 말에 일리가 있었다. 물론 아저씨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사건의 진위여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서로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져 있던 상태였다. 아저씨는 다짜고짜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통첩을 해 왔다. 나 역시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아?"라고 응수하며 싸움의 끝을 맺었다.


극적인 휴전

'나가지 뭐, 까짓것 나가면 되지 내 참 아니꼬워서.' 그런데 화가 좀 진정이 되자 막상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사실 300달러 월세로 안디잔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나은 집을 구할 자신이 없었다. 학교 통근하기 편리하지, 물 잘 나오지, 전기도 그럭저럭 사정이 괜찮지, 운 좋은 날에는 가스도 나오지, 집도 수리한 지 얼마 안 되어 깨끗한 축에 속하지.

게다가 집 앞 공터 너머 철조망으로 격리된 아파트가 하나 서 있었는데, 듣자 하니 안디잔의 비밀경찰과 그 가족들이 사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사는 아파트 동의 치안만큼은 안디잔을 통틀어도 매우 안정된 축에 속했다. 밤에 공터에 나가 어슬렁 거려도 부담이 없었다.

더욱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깨끗하고 위생적인 현대식 슈퍼마켓이 불과 얼마 전 문을 열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어도 상품 종류가 다양해서 공산품이나 식료품을 사는데 안디잔에서 이보다 나은 곳은 없었다. 심지어 한국산 라면이 10종류도 넘게 있었다.

하나 더 놓칠 수 없었던 건 바로 집 앞 공터에 있는 빵 공장이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요래 지켜보고 있다가 갓 구운 빵이 카트에 실려 밖으로 나오면 잽싸게 돈을 들고 뛰쳐나갔다. 하나에 120원 하는 따끈따끈한 빵을 종류별로 하나씩 두 개씩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급하게 구한  집이었는데 살면 살수록 점점 마음에 쏙 들었다. 말로만 듣던 안디잔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야 본 적도 없어 일단 차치하고 아무튼 이 가격에 이만한 집을 구한 건 운이 매우 좋은 거였다.


이사한다고 큰소리는 떵떵 쳐 놨는데 이를 어째야 할지 고민이 깊어져 갔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지금 사는 곳이 더 좋아 보이고 아쉽게 느껴졌다. 어디를 가도 이 만한 곳을 찾기도 힘들 거고 그게 아니라도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지난 일 년 간 월세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납부했겠다, 나름 집 청소도 열심히 해 두지 않았나. 일단 자존심을 굽히고 아저씨한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근 가스폭발 사건이 사실이라면 정황상 집에 들어와 볼 충분한 근거가 되긴 했다. 만약 사과를 했는데도 나가라고 한다면 까짓것 그땐 나가지 뭐, 나가면 되지. 하루 종일 이사 걱정과 어떻게 사과를 해야 잘하는 것일까 고민하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오후가 되자 아지즈벡이 나보다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이 잠시 흥분했었다며 당장 집을 나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월세를 3개월씩 몰아서 납부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아저씨에게 목돈이 필요하지 않았나 짐작이 되었다. 이유가 뭐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사과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지웠다.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여유를 부렸다.

"아캬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뭐 내가 계속 살아볼게."

극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니 집 없는 세입자에게 이보다 안심되는 일이 있을까.


계속되는 갈등

그 이후로 아지즈벡과 나와의 갈등은 다소 누그러진 감은 있었어도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아파트는 겉으로는 그럴 싸해 보였지만 막상 살아보니 부실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아는 한 이 집은 집세 대비 안디잔 최고의 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만큼 안디잔의 거주환경은 눈물이 날 만큼 형편없었다.

인근 3번가에 살고 있던 코이카 단원의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특히 겨울에는 거의 정전 상태였다. 식사 초대를 해서 갔더니 전등 대신 촛불이 켜 놓고 강제로 낭만을 누려야 했다. 한 겨울에는 냉골이 된 침대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벌벌 떨어야 했는데, 너무 추운 날에는 꺼이꺼이 울면서 밤을 지새웠단다.

또 다른  단원은 집세가 우리 집의 두배나 되는 2층 단독주택을 구해서 살고 있었다. 가스도 전기도 물 사정도 괜찮다는 집주인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실제로 여름까지는 그럭저럭 살기 괜찮았다. 정작 겨울이 다가오자 밤 9시만 되면 어김없이 전기가 끊겼고 아침 9시나 되어야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겨울밤이 얼음장처럼 춥고 길고 서러운 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추위는 집이 넓을수록 강도가 더했다.


내가 사는 집에는 일단 전기가 항시 들어오기는 했다. 그런데 전기용량이 너무 적어서 심심하면 두꺼비집이 내려갔다. 전등을 두 개 켜 놓고 tv를 켜면 백발백중이었다. 가스가 없을 땐 전기 인덕션으로 요리를 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전제품을 모조리 꺼둬야 했다. 어떤 땐 한번 나간 전기가 며칠씩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물도 대체로 잘 나왔으나 간혹 이유 없이 단수되어 생수로 세수를 했다. TV 케이블도 볼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파 수신이 끊어졌다.  

아저씨는 이것저것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나를 귀찮아하고 못 마땅해했다. 나 역시 고쳐주마 말만 하고 번번이 약속을 깨뜨리고 잠수를 타는 집주인 때문에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참다못한 나는 직접 전기회사, 케이블 회사, 수도회사로 전화를 하고 뛰어다녔다. 아파트 동장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 번은 직접 전기를 손본답시고 설레발을 치다가 감전된 적이 있었다. 머리칼이 쭈뼛서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한 순간이었다. 수리비 영수증을 놓고 매번 집주인과 실랑이가 오고 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우즈베크에서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했던 나의 고군분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 좀 살아 주면 안 되겠니 상황이 역전되었다

아지즈벡과 나와의 갈등이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때, 마침 우즈베크의 비밀경찰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안디잔에 거주하는 코이카 단원을 뒤늦게야 집들이에 초대했는데 이게 비밀경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것이다.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상한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탐문 수사가 벌어졌다. 나는 금방 혐의를 벗었지만 이번엔 집주인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경찰에 불려 간 집주인 아지즈벡은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집세를 신고 없이 챙겼으니 세금 탈루에도 단단히 엮일 수 있었고, 그동안 거주 등록 없이 외국인을 묵게 했던 건 심각한 위법행위였다. 다행히 나는 면책 특권이 있는 준외교관 신분이었고 우즈베크 정부가 보증 발급한 신분증도 소지하고 있었다. 이를 방패 삼아 아지즈벡은 여기저기 줄을 대어 사건을 잘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십 년 감수한 얼굴로 나타난 아지즈벡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해 왔다.

"혹시라도 경찰이 또 한 번 나타나 묻거든 집세는 안 낸다고 말해줘. 좋은 일 하는 봉사단원에게 나도 봉사하는 의미에서 무료로 살게 해 준다고 이야기했거든. 꼭 그렇게 얘기해야 돼."

마치 남의 집에 들른 듯 현관에는 발도 들이지 않고 문 밖에서 공손하게 말한 뒤 아지즈벡은 총총히 사라졌다.  


골칫덩이 세입자가 복덩이로 변한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이후 아저씨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그 전에는 내가 뭐 좀 고쳐달라고 하기가 무섭게 터키 어쩌고 집세 저쩌고 하는 레퍼토리를 입에 달고 읊어댔었다. "앞으로 한국인한테는 월세를 안 줄 거야. 집세를 지금보다 1.5배는 더 받아야 하는데 손해라고 손해. 다음엔 돈 많은 터키 사업가나 알아봐야지."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180도 역전되었다. "너 후임이 언제 온다고 했지? 여기서 살도록 잘 좀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월세도 안 올릴 거야. 집 좋잖아 그지? 꼭 여기서 살라고 이야기 좀 해줘."

덩치에는 안 어울리지만 핑크공주 취향에는 어울릴 법한 아지즈벡의 간절하고도 나긋나긋한 태도의 당부였다. 집주인에게 고장신고를 하면 수리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도 이전에 비해 많이 단축되었다. 물론 여전히 내켜하지는 않았다.

비밀경찰이 가져다준 소란 뒤 마침내 집주인 아저씨와 나 사이에 평화가 흐르기 시작했다. 혹여 내가 사는 집에 들러야 하면 아저씨는 사전에 반드시 양해를 구해왔다. 부인이 만들었다며 종종 음식을 가져다 줄 때도 있었고, 어린 아들들을 동반해서는 영어로 대화 연습 좀 시켜달라며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티를 냈다.


코이카 2년 임기를 마치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보름 뒤면 이제 우즈베크를 떠나게 된다. 한국으로 부칠 커다란 이민가방을 우체국으로 가져가야 한다니 아지즈벡은 기꺼이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집에 들른 아저씨는 거실에 장식용으로 놓여있던 하얀 호랑이 인형을 작별 선물이라며 가방에 넣어주었다. 내가 유난히 백호 인형을 아꼈던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날 아지즈벡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짐을 들어 내려주고 우체국까지 실어다 주고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안디잔을 떠나는 날, 내 짐을 공항까지 실어다 주겠노라며 먼저 약속한 것도 아지즈벡이었다. 물론 출발 시간이 임박해서도 아저씨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이 약속은 으레 그렇듯 '후도 호흘라사(인샬라)' 자연스럽게 깨져 버렸다. 알라가 원치 않는다는데 인간 나부랭이가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사실 약속을 지킬 거라는 기대도 크게 하지 않았었다. 1년 반 동안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지만 그러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임대인과 임차인의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산적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감수성만큼은 핑크 공주였던 아지즈벡 아저씨 덕분에 그래도 안디잔 생활이 다채롭고 격동적이고 그리고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새삼 감사함을 표하며 잘 지내기를 사업이 승승장구 하기를, 아마 내가 바라지 않아도 그건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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