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심리에 관한 리포트를 제출하시오
이 글은 대학교 1학년 작문 수업 시간에 제출한 과제입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휩쓸고 간 그 해였지요. 책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는데 읽어보니까 풋풋한 게 언제 이런 생각을 다 했나 싶고 약간의 재미도 있어서 그냥 버리기 아깝더라고요. 물론 비와 심리를 연관 지으라는 주제에다 내용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는 발싸심이 생생해서 분명 이거 미루다 미루다 한두 시간 만에 얼렁뚱땅 썼다는 게 너무나 분명 하대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가산점 준다'는 강사님 말에 혹해서 앞에 나가 발표까지 했었더랬지요. 글쓰기의 기역자도 잘 모르던 자연계열 학우들의 반응이 나름 괜찮아서 이번 성적은 됐다 싶었는데 결론적으로 학점이 상당히 낮게 나와 1차 데미지를 받았고요. 두 손 포개 잡고 고개 조아리며 이보다 공손할 순 없다고 자부하며 보낸 성적 문의 이메일에 담당 강사님이 그야말로 열폭하는 바람에 '감히 학생 나부랭이 따위가 내가 내린 준엄한 성적기준에 뭐어어? 의이이? 의이이이이??' 2차 대미지까지 입었던 흑역사로 남은 수업이었지요.
문법에 안 맞는 문장은 수정했고요, 전개 논리가 억지스러운 건 사포로 연마하는 심정으로 다듬었지만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것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진짜 이건 한두 시간 만에 쓴 게 틀림없는 리포트. 사실 그 시절 리포트 작성할 때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무던히도 긁어다가 차용했었는데 이건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봅니다. 아니 적당히 했기를 바라는 게 현실적인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 장마철, 기나긴 보충수업을 끝내고 여느 때처럼 기숙사로 돌아와 친구들과 점심밥을 먹곤 다들 열람실 책상에 다닥다닥 붙어 앉기 시작했다. 비는 청승맞게 며칠 째 주적주적 내리고 있었고 다들 기분도 그렇고. 그때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야! 우리 교복 입고 비 맞으러 나가자."
그 말에 우리는 서로 미쳤다는 눈빛과 재밌겠다는 눈빛을 재빨리 교환하며 기숙사를 뛰쳐나가 학교 운동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파란색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마치 정신 나간 스머프처럼 비 오는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라니. 우산을 쓰고 지나가던 후배들은 우리를 보고서 발길을 멈췄다. '쯧쯧쯧... 우리도 고3이 되면 저렇게 미치는 건가'하는 표정을 짓고선 말이다. 아랑곳없이 우리는 그저 깔깔대고 웃으며 억수로 퍼붓는 장대비를 맞았다. 고3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도 방학 동안 학교에 얽매여 있어야만 하는 처지도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도 모두 잊고서 그렇게 하늘이 내려주신 비를 실컷 느껴봤다. 그때 우리의 정신 나간 행동은 한가로이 교무실 창 밖을 보라 보던 선생님의 눈에 곧바로 들어갔다. 빗속에 서 있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니들 싹 다 교무실로 온나!!"
빗소리를 가르며 들리던 선생님의 야단 소리를 듣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다시 기숙사를 향해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젖은 교복을 말리지 못해 다음 날 단체로 학교 체육복을 교복 삼아 등교하는 해프닝을 벌이긴 했지만 덕분에 이젠 비가 오는 날이면 한 번쯤 생각나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이 생겼다.
날씨는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날씨가 맑은 날은 기분까지 들뜨게 되고 사람들은 뭔가 신나고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겨울이 가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처녀, 총각들 가슴에 설렘의 불길이 이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비가 오면 대개의 사람들은 기분이 스르륵 가라앉는 걸 스스로 느낀다. 그런 기분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반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좋다' 혹은 '싫다'로 나뉜다.
먼저 비가 좋다고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우주를 생성하는 다섯 가지 요인에는 물, 불, 금, 흙, 나무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바람과 비가 우주를 채운다"는 말이 있듯이 물은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다. 일반 성인의 체내 물 함량 비율은 80%에 이르고, 지구도 바다가 전체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많은 부분이 수분, 즉 물로 채워져 있다. 때문에 비를 통해 생명과 다산, 풍요, 환희까지도 느낄 수 있다. 요즘 같은 가뭄기에는 농작물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더더욱 비가 기다려진다.
비의 생성은 음과 양의 만남에서 발생한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야누스적이지만 비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제대로 표현한 셈이다. 그래서 비는 남녀 간의 애정을 뜻하기도 한다. 애정은 곧 감정의 고조를 나타내어 비 오는 날의 썸씽은 유난히 많다. 비 오는 날 애정도가 더욱 높아진다거나, 첫사랑이 문득 생각난다거나, 프러포즈를 결심한다거나 하는 심리는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싶은 안정적 욕구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의 남녀 간의 애정관계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대중가요 등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처럼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매개로 남녀관계가 이어졌다는 고전적인 이야기는 아직도 주위에서 들려온다. 우산을 씌워주고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이 행동은 어쩌면 유치하게 보이지만 비 오는 날이기에 센치해진 감정에 기대 설득력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비가 오는 날은 그렇지 않은 보통의 날보다 특별하다. 그래서 별 것 아닌 추억도 이날의 기억은 보다 더 오래 간직하게 된다. 또 비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윤활유 역할도 한다. 창 밖에서 내리는 보슬비를 보면서 옛 추억에 잠기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는 비가 지닌 청량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의 지든 대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비의 효과는 사람의 마음에도 정화작용을 해 준다. 사실 비 개인 오후의 날씨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라고 한다. 비 오기 전의 세상이 너무 둔탁해서 우리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가 왜 싫을까?
동물에게는 비와 관련된 본능이 있다. 비가 오면 천재지변에 대비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습성이 그것이다. 비 내리는 날에 꿩은 굶주림을 예측하고 논과 밭으로 내려와 먹이를 찾으며 개미는 대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삶을 유지해 나가면서 점점 비와의 친숙함을 버렸다. 지각이 발달하면서부터 본능을 최대한 배재하고 이성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삶을 이끌어 왔다. 감성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은 이성의 아래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비를 기피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비가 내리면 습도가 높아지고 불쾌지수 또한 올라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비가 오면 우울증에 빠진다. 비가 오는 날 기압이 낮아지면 뼈를 누르고 있는 관절들이 팽창하여 쑤시는 효과를 가져오고 이것이 신체적으로 찌뿌둥하다는 느낌을 가져온다. 이런 신체적인 부자연스러움은 곧바로 기분까지 찌뿌둥하게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비가 좋든 싫든 사계절이 뚜렷해서 맑은 날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기후에서 비가 오는 날은 조금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된다. 그저께 내린 비는 전국에 봄 가뭄을 해갈해 주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사람들은 아마도 한 번쯤 집에서 파전을 노릇노릇하게 부쳐 먹으면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를 가졌으면 생각해 봤을 것이다. 비와 심리와의 관계를 칼로 베듯이 정의할 순 없지만 맑은 날과는 또 다른 기분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음번 비가 올 때 나의 심리는 어떨지 찬찬히 느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