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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l 28. 2020

늦은 밤, 해남 생선장수 할머니가 끓여 준 미역국

대학생 시절 이야기이다.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한 해 전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왔었는데 그야말로 동에서 서를 가로지르는 대장정 길이었다. 위구르 족 자치구인 카슈카르를 지나 파키스탄 국경지대 바로 인근까지 이르는 길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첫 해외 배낭여행 치고 즉흥적이었고 위험했고 신비함 투성이었다. 내 삶에 여행이 들어와 앉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해외를 나가고 싶었지만 그전에 우리나라를 잘 아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번에는 국내여행이었다. 나는 특별히 자전거를 좋아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부터 제주도까지 자전거 여행을 펼쳐 보기로 결심했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무전여행을 하면 어떨까? 첫 번째 여행을 닮은 두 번째 여행도 즉흥적이었고 무계획적이었다. 손바닥 두 개를 붙여놓은 전국지도를 스카치테이프로 돌돌 말아 방수가 되게 한 후 25L짜리 작은 배낭만 둘러맨 채 무작정 출발이었다. 출발일은 여름 장마의 시작 날이기도 했다. 평생 우산 없이 맞을 비를 이때 다 맞았던 것 같다.


자전거 무전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충청도를 끼고 죽 내려와 남도길을 따라가다 내륙의 최종 종착지, 완도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완도에서 하루를 보내고 본격적인 제주도 일주에 나설 참이었다. 완도에 다다를 즈음엔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맛비가 어느덧 잠잠해진 대신 뜨거운 햇볕과 싸우며 힘겹게 페달을 밟아대야 했다. 이 속도라면 해가지기 전에 완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도, 완도, 돌김의 고장 완도. 이때까지만 해도 섬이라고 하면 자전거로 한 바퀴 죽 돌 수 있는 크기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여행에 들고 나선 자전거는 집에서 타는 마실용 접이식 자전거였다. 보름간 쉴 새 없이 매일 10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쯤되면 자전거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봐야 했다. 마침내 뒷 타이어가 맥없이 푸수숙하고 도로에 주저앉았다. 완도까지는 아직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자전거 펑크가 났으니 속수무책이었다. 뒤에 매달아놓은 배낭에는 이럴 때를 대비한 아무런 연장이나 도구가 없었다. 가진 거라곤 여벌 옷뿐이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뒷바퀴에 들이박고 주저앉았다. 뭐가 얼마나 어떻게 잘못된 건지 살펴봐야 했다. 그때 파란색 용달차 한대가 도롯가에 섰다. 운전자 아저씨는 펑크 난 자전거를 보고는 트럭 뒤에다가 실었다. 덕분에 나는 보름 만에 처음으로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와 트럭 조수석에 편안히 앉아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문명이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걱정은 뒷전이고 금세 흥얼흥얼 거릴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아저씨는 완도로 향하는 도로가에 위치한 커다란 오토바이 가게 앞에 차를 멈추었다. 오토바이 가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토바이 바퀴와 자전거 바퀴는 원리가 달랐다. 다시 용달차 뒤에 자전거를 실었다. 하는 수 없이 용달차 아저씨는 가던 길을 돌려 완도읍내 자전거 점포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담아 꾸벅 절을 올렸고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용달차에 올라 차를 돌려 사라졌다. 자전거 점포는 상당히 컸고 사람들로 꽤 붐볐다. 내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내 차례. 나는 자전거 펑크 때우는 법을 꼼꼼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자전거 여행 중인데요, 펑크 때우는 법을 배워서 활용하려고요."

자전거 방 주인아저씨는 친절했다. 노랑머리를 하고 새까맣게 탄 얼굴에 눈만 반짝이는 자전거를 하나도 모르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바퀴 펑크 찾는 법부터 때우는 법까지 차근차근 상세히 알려주었다. 덕분에 혼자서 펑크 난 바퀴도 때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친김에 고무 패치 10개, 본드를 하나 샀다. 서비스로 튜브 고무를 갈 수 있는 밀톱이 따라왔다.


밖으로 나오니 7월 한 여름, 해는 어느새 저물어 있었다. 원래는 지도에 표시된 사찰을 찾아가 하룻밤 묵어 갈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었다. 절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 자전거를 끌고 어스름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러 나온 할머니들이 몇몇이 평상에 두런두런 앉아 있었다.

"할머니, 절에 가려고 하는데요. 이 길이 맞나요?"

할머니들은 이 길로 곧장 올라가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해가 저물면 절은 문을 닫아건다고 했다. 이런... 자전거를 고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실망이 눈덩이처럼 불어갔지만 이 밤에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일단 가던 데로 계속 발길을 옮기는 수밖에. 열 걸음쯤 떼었을까, 할머니 한 분이 뒤에서 급하게 불러댔다. 지금 절에 가 봤자 문을 닫았을 것이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앗싸! 당장 방향을 반대로 돌려 할머니를 따라 쫄래쫄래 나섰다.

골목을 꼬불꼬불 따라갔다. 언덕배기 중턱 즈음에 자리한 산동네를 걷고 있었다. 섬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할머니는 주인집 한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 들어 혼자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공용화장실이 있었고 물은 아침, 저녁으로 2시간씩만 급수되고 있었다. 부엌 겸 욕실에는 욕조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빨간 다라이에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자전거 무전여행 중이라는 내 말에 할머니는 분주하게 저녁밥을 짓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부둣가에서 생선장사를 하셨다. 저녁 메뉴는 생선 미역국이었다. 산간 내륙지방에서 나고 자란 촌놈은 생전 처음 보는 메뉴였다. 생선뼈가 입 안에서 깔끄러웠다. 태어나 처음 맛본 생선 미역국은 너무나 인상 깊어서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맛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맛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생선 특유의 비린 향이 살아있는 말 그대로 생선 미역국이었다. 할머니와 소반에 마주 앉아 늦은 저녁밥을 먹고 부엌 겸 욕실에서 땀에 절은 몸을 시원하게 씻어낸 후 세상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아침을 먹고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밥값을 할 차례였다. 부둣가 생선 좌판으로 갔다. 바닷물을 길어다 생선이 담긴 통 가득가득 채워 넣어갔다. 좌판에 생선을 이리저리 진열하고 드디어 하루 장사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쓰는 핸드폰 요금제가 너무 비싸단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근처 통신사 대리점으로 가 저렴하고 알뜰한 요금제로 변경해 드렸다.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오전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제주도로 가는 선착장을 찾아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근처 바닷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그 날 오후 제주도로 가는 쾌속선 배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물론 표는 할인이었다.


그 해 여름 치열했던 자전거 무전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한 달간 앓아누웠다. 여독은 지독했다. 다시 학기가 시작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새 겨울 방학이 돌아왔다. 더 늦기 전에 미뤄뒀던 마음의 빚을 덜어야 했다. 연말을 맞아 자전거 무전여행 중 신세 졌던 분들 한 분 한 분께 감사 마음을 담은 연하장을 띄웠다. 물론 완도 생선장수 할머니께도 안부를 여쭙고 감사 말씀을 적은 카드를 보냈다. 얼마 뒤 집으로 두 개의 연하장이 반송되었다. 수취인 불명. 그중 한 명이 완도에서 늦은 밤 생선 미역국을 정성스레 끓여주던 할머니께 보낸 카드였다. 우편물을 확인해서 적어 온 거라 분명 주소는 맞는데 왜 반송이 되었을까. 할머니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까, 아니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까. 끝내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십 년쯤 지나서 완도에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부둣가 생선 좌판이 어디메인지 단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자전거로 돌아보던 완도와 십 년 후 완도는 다른 곳이었다. 깜깜한 밤, 어둠 속을 헤매던 자전거 여행자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나 주었던 완도의 생선장수 할머니를 다시 뵙고 싶었는데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할머니가 끓여 주신 생선 미역국의 신선한 충격의 맛은  후드득 후두둑 거세게 쏟아붓는 장맛비 속에서도 여전히 기억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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