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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Feb 23. 2021

Epilogue

여행이 끝났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불현듯 시작되었던 여행은 끝도 급작스레 나 버렸습니다. 은산의 대지구탐험 여행은 당분간 임시휴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만 해도 한국에 돌아온 김에 일단 여행기를 정리하고, 그다음 여행을 이어가자고 마음먹었더랍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끝이 보이지 않았고 여행은 발목이 잡혔습니다. 그 사이 저는 대학교로 돌아가 스무 살에 중도 작파했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글은 점점 뒷전이 되어갔지만 어쨌든 여행기를 끝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 눔의 파편 같은 글을 붙잡고 있은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에혀.

이쯤에서 책을 마무리 짓든가, 아예 몽땅 엎어버리든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소화 안 된 듯 더부룩하고 불편하고 속 시끄러운 심경을 내내 떨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무거운 돌덩이라도 짊어진 마냥 이젠 어깨도 뻐근해져 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 글을 책으로 보고 계시다면 어떻게 싹 엎어버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거슨 불행인가 다행인가.


제 친구 중에, 2년간 오로지 자전거로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던, 의지가 보통 굳은 게 아닌 녀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해 수술까지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자, 친구는 자전거와 배낭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채 귀국을 했더랬지요. 한 달이 지날 무렵, 친구가 이런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일본 집에 돌아와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그동안 정말 여행한 게 맞을까? 길 위에서 보낸 치열한 시간은 어디로 가 버렸나. 나는 다시 2년 전의 나와 연결되어 버린 것 같아. 대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거지..."

배낭을 짊어지고 유라시아 대륙을 미친놈처럼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눌어붙어 자빠져 있던 저도 친구와 똑같은 심정을 느꼈습니다. 일상은 여전했고 저는 그 일상을 살아가는 예전의 나로 변해 있더군요. 똑같이 게으르고 똑같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만 후퇴해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체 길 위에서 보낸 나의 치열하고 맹랑하던 몇 년의 시간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내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습니다. 여행할 때 그때는 뭐라도 할 수 있고, 닥치는 대로 막 헤쳐 나갈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를 살린 글쓰기

여행을 중도 작파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 한동안 할머니 병간호에 전념했습니다. 병간호하는 몇 개월 사이 저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습니다. 여행하며 세상 길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자유로운 영혼은 온 데 간데없고, 대신 하루 종일 어두컴컴하고 우울한 병실에 갇혔습니다. 환자 곁에서 하루하루 생과 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다 보면 긴장이 늘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환자의 고통과 짜증을 받아 주고 사소한 것까지 수발들다 보니 제 자신은 항상 뒷전이 됩니다. 화와 분노와 좌절과 아무튼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몸과 정신에 마구마구 쌓이다가 조금이라도 툭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 자신이 환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의욕과 욕망과 활력을 잃은 채, 한동안 그냥 누워만 있었습니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밥술 뜨는 것도 마냥 귀찮고 짜증 나는데 대체 뭘 하라고요. 게다가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허리가 아파와서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차츰차츰 일어나 앉았고 그냥 있긴 심심해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직장 커리어도 끊기고 익힌 기술도 딱히 없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여행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을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좀 많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덜 없어 보일까 고민을 하다 여행기라고 그럴싸하게 이름 붙이며 글을 써본 것입니다.

사실 여행 경험을 되살려 본 것뿐,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을 써 보는 게 처음인지라 문장은 서투르고 흐름은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이 따위가 글이나 되겠냐 싶은 생각에 한숨이 나왔지만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거 말고 딱히 할 게 없었다고요 (휴, 먼 산을 응시한다). 어쨌거나 가뜩이나 해마 성능이 좋지 않은 터라 장기 기억이 몽땅 지워지기 전에 꾸역꾸역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붙잡고 사오정 마냥 늘어진 게 벌써 3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달려들던 무력감, 지루함이 글을 쓰면서 잠잠해졌습니다.

여행기를 다시 읽어보면 제가 써 놓고도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다 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제가 막 거짓부렁으로 지어내고 그런 건 없습니다. 사람 이름이 잘 기억 안 나서 창작한 건 좀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 능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상대의 뜻을 제 멋대로 왜곡했을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여행기를 쓰면서 신기한 경험을 두 가지 했습니다. 이미 너무 희미해진 일들이라 이게 기억이 날까 싶었는데 한순간을 기억해 내자 그다음 순간이 자동으로 떠오르고 그럼 그 다음다음 순간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일들도 기어코 기억을 해 내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별로라고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사실 제가 직접 경험을 했다고 한들 잊히면 그걸로 그만이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기억이 되살아 나는 건 물론이고, 그 속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단순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글로 적다 보면 시간과 공간이 재구성되며 다른 의미를 가진 이야기로 변모해 버립니다. 왜 바둑에 복기라는 게 있잖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시금 바둑알을 놓다 보면 그 순간 미처 알지 못했던 전략이라든가 전술이라든가 숨은 의미를 알게 되는 그런 거 말이죠. 때로는 하나의 수가 다른 수와 이어지고 연결되며 큰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때는 세상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던 일상이 큰 그림으로 다시 보자니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란 바둑의 복기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여행을 관통할 바늘과 실을 찾아

그렇게 적어 둔 이야기들은 맥락 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습니다. 과거 일을 재빨리 잊어버리는지라 불과 5년 전 이야기가 몇십 년이라도 지난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래도 이게 정말 내 경험이 맞다고 하니 나는 이런 일들을 왜 했던 것이고, 대체 무엇을 위해 길 위를 이다지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긴 시간과 꽤 많은 비용과 그리고 치열한 에너지를 쏟아부어 대체 내가 얻고 싶었던 건 진짜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저렇게 써 내려간 여행 경험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정수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저는 참 자신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DNA는 따로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릴 적 우연히 본 TV에서 성공한 재미교포 여성 사업가가 등장해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를 외치며 평범한 이들을 독려해 댔지만 영 내 입에는 붙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그저 주인 잃은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나를 잠자코 받아들일 순 없었던게 그런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이대로 살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서른 중반, 저는 짐을 쌌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목표도 목적도 딱히 없었지만 왠지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거든요. 기한도 목적지도 없는 말 그대로 방랑이었습니다. 저는 길 위에서 끝없이 움직이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옆에는 동료도 길잡이 책도 없었기에 내가 따를 거라곤 오로지 내 목소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딱히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저의 오랜 절친은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독실한 종교인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절대자 신을 믿고 의지하는 친구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왔지요. 친구는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웠을 때 신에게 기도하고 나서야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고 고요히 고백해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여행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얻은 셈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 안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구분할 줄도 몰랐습니다. 안에서는 수십 가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싸워댔지만 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저는 언제나 혼자였고 어디에도 걸릴 게 없는 자유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안의 목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할수록 잡음이 줄어들었지요. 명징히 울려대는 내 안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 일은 저절로 풀렸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음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내가 의지한 거라곤 오로지 내면의 목소리 뿐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한 차례, 두 차례 그리고 무수히 반복되었고 그러는 사이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신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언제나 내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나는 믿지 못했을 뿐이었지요.


여행을 통해 얻은 한 가지, 내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한 가지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바깥을 바라보고 바깥에 휘둘리고 바깥에 몰두할 게 아니었지요, 저는 시선을 안으로 안으로 돌렸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잘 듣고 행동하면 된다, 생각보다 아주 심플한 인생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미리 걱정할 것도 우려할 것도 드뭅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나를 믿고 따르면 되거든요. 나는 알아서 잘 대응할 것이고, 그렇다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건 누가 나에게 가르쳐 준다고 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를 믿으러 가는 여정, 나를 향하는 여정. 배경은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이었지만, 결국은 내가 끌고 다니던 160cm 남짓한 몸뚱이의 주인, 나에 관한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짐을 내려둡니다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저는 글쓰기로 두 번째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 모든 순간이 마냥 그립지만 이제는 저의 책 속에서 편히 잠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그만 내 위속에서, 내 어깨에서 내려와 주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산산이 흩어져 있는 그간의 여행기를 꿸 만한 바늘과 실도 가까스로 찾아냈으니, 그렇다면 이제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에서 그것들로 보배를 만들러 나설 차례입니다.  

'Hard Bliled Trip: 완전히 삶은 이야기'에는 제가 유라시아 대륙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수집한 이야기들이 그냥 아무 페이지고 등장합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피와 땀으로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건 모르겠고 땀으로 쓴 것만은 확실합니다. 제가 수족 다한증이 있거든요.

독자분께서 충분히 시간이 있으시다면야 머리를 식힐 겸 언제라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또 그리 하셨다면 저는 마냥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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