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나이 다루살람 왕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우리 엄마가 작년에 관광 갔었는데 실망만 잔뜩 하고 돌아오셨어. 아무것도 볼 게 없다는데?"
친구는 은근히 나를 만류했다. 사실 브루나이를 막 엄청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달리 가고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땐 구관이 명관이라고 원래 계획대로 하면 된다.
브루나이행 페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말레이시아 현지인들은 배 값을 할인받는다는 정보가 있었다. 짠돌이 여행자인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나는 현지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브루나이행 페리 티켓을 거의 절반값에 예매할 수 있었다. 무척 흐뭇했지만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승선자 이름이 현지인 친구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권명과 다른 이름이 적힌 티켓을 들고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는 게 가당키나 할는지, 현지인 친구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항구 터미널 입구에서는 표를 가진 사람만 대기실로 입장시키고 있었다. 직원은 내가 내민 표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기계적으로 티켓 한쪽 귀퉁이만 찢어갔다. 1차 관문 통과.
안도의 한숨도 잠시였다. 대기실에 앉아 승선권을 살피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티켓은 하루 뒤인 12월 24일 자로 발권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뿔싸 이건 오늘이 아니라 내일 표잖아! 아이고 친구야. 이제와 창구로 가서 표를 교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냥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승선을 앞두고 여권과 승선권 검사가 시작되었다. 내 맞은편 줄을 흘끔 보니 딱 보기에도 아주 옹골찬 인상의 제복 입은 검색대 직원이 승객 한 명 한 명의 여권과 승선권을 꼼꼼히 대조하는 중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백발백중 걸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심장이 쫄깃해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긴장한 손으로 여권 사이에 티켓을 끼워 내밀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직원은 저 쪽 줄 요원과는 대조적으로 티켓은 안중에 없다는 듯 오로지 나의 여권만 싁하고 검사하고 말았다. 어휴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2차 관문도 통과였다.
배에 오르니 입구에서 청년 직원 하나가 승객의 표를 확인하며 좌석 안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승선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린 채 표를 내밀었다. 내 자리는 비즈니스 석이라고 안내한다. 이렇게 3차 관문도 통과.
이미 내 좌석에는 오늘 날짜로 예약했을 걸로 짐작되는 승객이 앉아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빈 좌석 아무데에나 퍼질러 앉았다. 드디어 엔진 소리가 요란해지더니 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배는 떴고 나는 말레이시아 국경을 무사히 떠나는 중이었다.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창 너머로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나는 마음을 푹 퍼질러 놓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이 채 꺼지기도 전, 그러면 그렇지 국경 넘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었다. 객실 입구에서 젊은 직원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승객들 표를 일일이 받아 들고선 반쪽을 찢어 가고 있었다. 어 저건 뭐지? 이마에서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번에야말로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내일 날짜 표를 들고 탔으니 자연스레 질문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어설픈 나의 중국어 때문에 정체가 발각되기란 시간문제였다. 이건 뭐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문득 개구진 생각을 했다. 이거야말로 내 운을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만약 이 마지막 관문마저 넘어서 라부안까지 무사히 당도한다면 말이지, 이제는 참말로 내 운을 믿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표를 검사하던 청년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태연한 척 티켓을 들이밀었다. 티켓을 받아 든 청년은 어쩐 일인지 반대편 창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며 티켓을 죽 찢더니 나머지 반쪽을 나에게 돌려주고선 다음 승객을 향해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얼떨결에 너무나 쉽게 4차 관문마저 통과.
나는 약간의 불안함과 그리고 약간의 배짱을 부리며 즉시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돌발상황은 원치 않았다.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하도록 원천봉쇄 작전을 펼치고자 잠자는 척 하기로 한 것이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던 것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꽤 지나 있다고 느껴졌는데 시계를 봤더니 내려야 할 때가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무사히 나는 일련의 국경 검색대를 모조리 통과한 셈이었다. 그래 이 맛에 여행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에피소드는 다시 한번 내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돈을 아낀 것도 물론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역시 나는 운이 좋구나, 내 운을 믿어도 좋다는 긍정의 힘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을 뻔한 필리핀 사건 이후로 어깨가 잔뜩 움츠러 들어 있었다. 어리석은 나의 선택을 생각하면 할 수록 후회했었다. 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실은 말이야. 세상에는 즐거워할 것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을 아끼자고 내 운을 걸지를 않았나, 덕분에 세상이 온통 내 편이라도 된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었다. 소소한 금액으로도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니, 부자가 아니라서 가능하고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볼 것도 기대할 것도 없을 거라던 브루나이행은 이렇게 시작부터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선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