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중순의 월요일이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출발해 관광도시로 유명한 크라코우(영어식 지명 크라쿠프)로 이동하기로 했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박살이 났고 이후 재건한 도시이다. 반면 폴란드 제2의 도시라는 크라코우는 전통적으로 폴란드의 학문, 문화,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보존도 잘 되어서 구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대학생들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크라코우는 전통과 젊음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활기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크라코우 인근에는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소금광산 등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여러모로 인기가 높은 도시였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폴란드를 여행한다면 반드시 크라코우에 들러 볼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 추천을 접수한 나는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코우로 향했다. 물론 히치하이킹을 해서 말이다.
바르샤바 도심에서 히치하이킹을 시작할 외곽까지는 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차비 그 몇 푼을 아껴보겠다고 나는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았다. 바르샤바 길거리 구경도 할겸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나?
기대와는 달리 가는 길에 구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인도는 포장상태가 엉망이어서 수시로 차도로 내려섰다 인도로 올라왔다를 반복해야 했다. 자동차 매연은 또 얼마나 지독한지 숨을 쉬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눌러대니 자꾸만 짜증이 솟구쳤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이번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고속도로 휴게소에다 우산을 놓고 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남의 집 지붕 아래 신세를 져야 했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안전상 이유 때문에 나는 히치하이킹은 해가 있는 동안만 시도하자고 원칙을 세웠었다. 가뜩이나 출발이 늦었는데 길바닥에서 벌써 두 시간째 까먹고 있었다. 와중에 또 배가 고파왔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이끌고 마침내 찜해 두었던 히치하이킹 포인트에 다다랐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주변을 가만 살펴보니 문제가 있었다. 도로에 갓길이 없었던 것이다. 히치하이킹을 하려면 당연히 갓길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봐도 일대엔 차가 정차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횡단보도 앞에서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멈춤 신호일 때 누군가 차 문을 좀 열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10분, 20분... 1시간... 나를 태우려는 운전자가 없었다. 1시간 반이 넘어설 즈음, 드디어 차 한 대가 클락션을 울렸다. 검은색 고급 세단이었다. 정지신호가 바뀔세라 묻고 따지고 할 새도 없이 나는 일단 차에 올라탔다.
"여기서는 차량이 너무 많아 히치하이킹이 힘들어요. 가는 길에 차를 잡기 수월한 지점에다 내려줄게요."
다행히 50대로 보이는 운전자의 인상이 무척 좋았다. 영어가 유창한 운전자는 독일계 한 제약회사의 대표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아저씨는 크라코우 방향과는 영 관계가 없었는데도 히치하이커가 안쓰러워 보여 차를 세웠다. 역시나 아저씨도 소싯적 히치하이킹을 자주 했었단다. 왕년의 히치하이커들은 젊은 히치하이커를 목격할 때마다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껴서인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여기서는 비교적 차를 잡기가 수월할 거예요. 직진방향의 차를 잡으면 돼요."
20킬로미터를 달린 뒤 삼거리가 나오자 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아저씨는 선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우회전을 해서 사라져 갔다.
나는 아직도 바르샤바
시작이 반이라고 첫 히치하이킹 성공의 기세를 몰아 크라코우로 가는 차를 곧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한껏 김치국을 들이켜고 있는데 이번에도 선뜻 나를 태우려는 차량은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히치하이킹의 희망도 점점 옅어질 무렵, 마침내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어서 타 어서. 가다가 내려줄게."
운전자의 이름은 사만드로 이집트에서 이주해 온 30대 남성이었다.
"사실 아까 너를 지나치며 봤었어. 폴란드에서는 히치하이킹 하기가 매우 매우 어렵거든. 네가 안 돼 보여서 되돌아온 참이야."
사만드는 쟤 하루 종일 저기에 저러고 있겠다 싶어 일부러 유턴까지 해가며 되돌아온 참이었다. 폴란드에서 5년 넘도록 사업하고 있는 그가 보기에 폴란드인은 너무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일도 생활도 쉽지 않은데 히치하이킹은 더더군다나 쉽지 않을 거란다. 나는 폴란드를 잘 몰랐지만 이 순간만큼은 격하게 동의하고 싶어졌다.
사만드는 아주 친절한 성격이었다. 홀로 떠돌아다니는 히치하이커를 어떻게든 돕고 뭐라도 주고 싶어 했다. 심지어 자신이 먹다가 삼분의 일쯤 남긴 햄버거를 나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파오던 참이라 나는 하마터면 좋다고 주워 먹을 뻔했다. 머잖아 사만드는 한적한 국도변의 버스정류장 앞에다 나를 내려 주었다. 히치하이킹을 하기 더없이 좋은 위치같았다.
"굿럭 굿럭 친구"
아무 대가 없이 낯선 이를 기꺼이 도와주고 쿨하게 돌아서는 인간의 마음은 늘 감동을 준다.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만드 같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버스정류장 앞으로 갓길이 널찍했다. 전방에는 횡단보도가 있어 차들은 신호에 맞춰 일정 간격으로 멈춰 섰다. 최적의 히치하이킹 포인트였다. 마음 같아서는 10분 안에 차를 잡고야 말 것 같은데 이번에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버스정류장에도 서 있다가 횡단보도 앞에도 서 있다가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봐도 차를 잡을 수 없었다. 갈 길은 200킬로미터도 넘게 남았는데 머지않아 해가 저물 터였다. 이만 히치하이킹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길 아래로는 탁 트인 벌판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해가 질 무렵까지 차를 못 잡으면 이 근방에서 하루 묵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히치하이킹을 포기하다시피 했더니 초조할 것도 달리 안달날 것도 없었다. 초연한 마음에는 평온마저 찾아 들었다. '크라코우'라고 쓰인 사인보드를 들고 있던 팔은 마비된 듯 저려왔다. 나는 당장 팔을 내리고 정류장 벤치에 퍼질러 앉았다. 차라리 폴란드어 기초회화를 외우는 편이 실속있겠다 싶었다. 그러다 지겨우면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눈 앞에 스쳐가는 차량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차피 안 세워줄 걸 알았다. 그래도 아예 히치하이킹을 포기한 건 아니라서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씩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기는 했다.
크라코우에 도착할 계획은 애저녁에 어그러졌다.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당장 어디서 밤을 보내야 하나 골똘히 궁리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운 좋은 히치하이커였던가 새삼 반추해 보았다. 이쯤이면 초심자의 행운도 바닥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나는 전방에 차 한 대가 멈추어 선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운전자가 클락션을 울려서야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빨간색 스포츠카였다. 그제야 깨달은 나는 황급히 배낭을 들쳐 메고 전방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운전자는 중년 남성이었다. 비록 영어가 서툴렀지만 의사소통을 할 정도는 되었다. 아저씨는 키엘체라는 도시로 가는 중이었다. 같은 방향인지라 100킬로미터는 얻어 탈 수 있겠다. 하루해가 다 저물어갈 무렵에야 비로소 히치하이킹다운 히치하이킹이 시작되다니. 하기야 바르샤바를 벗어나게 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스포츠카 레이싱
아저씨는 민소매에 청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몸집이 상당히 우람했다. 락커처럼 머리가 치렁치렁했는데 고무줄로 대충 묶고 있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 같았다. 급박한 마음에 다짜고짜 차에 오르긴 했는데 아저씨의 범상찮은 외모와 '새빨간' 스포츠카라는 좀체 보기 힘든 조합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특이하게 아저씨 차에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파수를 타고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직지직 소리를 내며 실시간으로 울렸다. 직업이 마피아 같지는 않고 경찰쯤 되겠거니 좋은 쪽으로 짐작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전기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경찰도 마피아도 아니었다. 폴란드의 운전자들은 실시간 교통상황을 공유하기 위해 무전기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xx방향 xx지점에 교통단속 떴어요, 조심해 다들""xx 가는 길에 차가 많이 막히나요? 주변에 있는 분 좀 알려주세요" 뭐 이런 내용들이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무료하던 찰나, 나는 아저씨에게 폴란드 말을 몇 마디 배워보기로 했다. 경험상 현지인에게 언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 친밀감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아저씨는 시크한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배운 대로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은산이에요''고맙습니다' '이거 얼마예요?''깎아 주세요' '하나 둘 셋 넷...' 등등을 중얼중얼 연습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무전기를 빼 들더니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무전기를 건네받은 나는 방금 연습한 폴란드어를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산입니다. 어.. 어.. 이거 얼마예요? 하나 둘 셋 넷... 감사합니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곧이어 영어로 내 소개를 이어갔다. "저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이고요, 지금 히치하이킹으로 폴란드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안전 운전하시고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응답을 해 왔다. 현지인들과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소통을 한 재밌는 경험이었다.
국도를 지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아저씨가 급작스레 자동차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엑셀레이터를 꾸욱 밟자 계기판은 시속 160, 180, 200, 220을 넘어서 240을 찍고 있었다. 작은 언덕들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흡사 붕붕 날고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안전 손잡이를 꽉 쥐었다. "무섭니?" 아저씨가 하얗게 질린 나를 보더니 속도를 조금 낮추었다.
"아니요 재밌어요" 나는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눈을 치켜뜬 채 무섭지 않으니 그대로 가자는 되지도 않은 호기를 부렸다. 아저씨는 껄껄 웃더니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계기판은 240, 241, 245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생전에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레이싱을 즐겨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이런 게 히치하이킹의 묘미였다.
키엘체라는 도시 외곽을 지날 때였다. 아저씨는 여기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참이었다.
"이제 곧 깜깜해질 텐데 시내에서 숙소를 찾아 하루 묵어가는 게 어떻겠니?"
아저씨는 내가 원한다면 시내에다 내려 주겠노라 말했다. 곰곰이 거리를 따져보니 여기서 크라코우까지는 90~100킬로미터가량 남아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은 남아 있었다. 운이 좋으면 당일 안에 크라코우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히치하이킹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은 금세 까먹어 버렸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낙관적으로 변하곤 했다.
아저씨는 갓길에 나를 내려 주고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고속도로 히치하이킹이 불법인 나라가 많았지만 여기서는 괜찮다는 아저씨의 말을 믿고 나는 일단 차를 잡아보기로 했다.
히치하이킹 도중 해가 저물어 버렸다
차는 간간이 지나다녔지만 차량 속도가 엄청났다. 운전자가 나를 발견할 수나 있겠나 싶을 정도로 차들은 쌩하고 내달리며 지나갔다. 히치하이킹 포인트를 옮겨 보기로 했다. 이 곳이 나을까 저곳이 나을까 벌써 자리만 옮긴 지 네 번째였고, 결과는 번번이 허사였다. 이 곳에서 이 시간에 크라코우로 가는 차를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애초에 아저씨를 따라 시내로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히치하이킹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시간이 넘어섰다. 해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고속도로를 벗어나야 했지만 미련이 남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10분만 더 했지만, 간절한 마음과는 별개로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깨끗이 포기하고 고속도로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서둘러 인가를 찾아 숙박할 곳을 알아봐야 했다. 막상 고속도로를 벗어나려 했더니 도로는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차가 안 오는 틈을 타 고속도로를 이리저리 횡단해 가다가 운 좋게 보행자용 좁은 철계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겨우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중앙분리대가 견고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도로를 건너갈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조그만 개울가를 따라 산책로를 걷다가 덤불을 헤치고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위로 위로 기어올라왔다. 길을 찾아 헤매는 사이 해는 완전히 저물어 버렸고 사방은 그야말로 어둑살 땅거미가 붉은빛을 띠며 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GPS지도를 켜서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건물이 몇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성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하나 있었다. 숙박업소가 없더라도 성당 지붕 아래에서 어찌 하룻밤 이슬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보며 조그마한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길로 접어들었을 때 왼쪽 옆으로 아주 정돈이 잘 되어 있는 전원주택이 한 채 보였다. 나지막한 담장에 새파란 잔디가 깔려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정원에 잘 심어진 나무 사이로 예쁜 그네가 매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 담장 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인근 외딴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빈집이거나 별장으로 사용되는 집은 아닐까 추측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조그마한 창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이렇게 동화처럼 아름다운 정원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슬을 피할 지붕만 있어도 감사한 처지였다. 거기에 욕심을 하나 더 내보자면 '안전'한 공간이 필요했다. 울타리가 쳐져 있고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너무 부러운 순간이었다. 따뜻하게 내한 몸 뉘일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절절이 깨닫던 순간이었다.
산책 중이던 강아지와 할아버지와의 기막힌 만남
나는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을 찾으려면 2~30분은 더 걸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약간 구부정했음에도 키가 무척 큰 할아버지 한 명이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저녁나절에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참이었다. 강아지는 조그마하고 하얀 털이 북실북실해서 무척 귀여웠다. 나는 강아지에게 “안녕 안녕”하며 되지도 않는 손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강아지를 지나쳐서 씩씩하게 계속 발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문득 저 할아버지와 대화를 좀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할아버지에게로 단숨에 뛰어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할아버지에게 일단 폴란드어로 인사를 건넸다. 알고 있는 폴란드어가 바닥났다.
"저기 말씀 좀 여쭐게요."
영어로 말을 거니 할아버지가 더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혹시 러시아어는 알아듣지 않을까?
"이즈비니쩨 빠좔루스따(실례합니다). 모쥐나 스쁘라시쯔(말씀 좀 여쭐게요)?"
내가 러시아어로 말을 건네자 그제야 할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러시아어는 아니었고 폴란드어 같았다. 언어의 뿌리가 같아서인지 희한하게도 나는 몇몇 단어를 알아듣고 뜻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러시아어로, 할아버지는 폴란드어로 기묘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더 신기한 것은 서로의 말뜻을 이해하고 각자 응답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내 소개를 간단히 마친뒤 인근에 숙박업소나 성당이 있는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성당이 있는 건 맞는데 숙박업소는 있다는 것도 같고 없다는 것도 같았다. 어쨌든 성당이라도 있다니 다행이었다. 용건이 끝났다. 왠지 그대로 돌아서기가 아쉬워졌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은 마음에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집에, 지금 사람이 살고 있나요? 제가 히치하이킹을 하다 날이 저물어서 묵어갈 데가 필요한데요. 저한테 침낭은 있거든요. 혹시 이 집 정원에서 하룻밤 신세 져도 될까 물어보고 싶거든요. 지금 이 집에 사람이 있는지 아세요?"
할아버지는 내 말이 끝나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는가 싶더니 강아지 산책을 황급히 중단하고는 그림 같은 정원 집으로 강아지와 함께 쏙 하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이 집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황당한 우연에 어리둥절했다. 이 집에서 하룻밤 묵으면 참 좋겠다고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인데 정말로 집주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일이 잘 풀려가는가 싶어서 괜히 심장이 두근댔다.
할아버지는 한참이 지나도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졌다. 일이 잘 안돼 가나 싶어 초조한 마음이 생겼다. 한편으론 내가 할아버지 말뜻을 잘못 이해한 건가 싶었다. 그냥 가라는 걸 기다리라고 해석한 걸지도 몰랐다.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서 나는 대문 앞을 서성댔다. 20분쯤 흐르자 마침내 한참 만에야 할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선 나에게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엄청난 소식을 전해주었다.
낯선 곳에서의 완벽한 하룻밤
'꺄호'소리가 절로 나왔다. 희망사항에 불과했을 뿐인데 정말로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에는 집이 한 채가 아니라 두 채가 서 있었다. 본채를 지나 할아버지는 안쪽에 있는 별채로 나를 안내했다.
집 안에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혹시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어오셨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사양의 미덕을 잊은 지 오래였다. 할머니는 따뜻한 홍차와 토마토를 얹은 샌드위치를 마련해 주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었다. 빵에 버터와 토마토만 올라갔을 뿐인데 지금까지 먹어 본 최고의 샌드위치였다. 할아버지는 본채에 살고 있는 딸이 곧 들를 거라고 했다. 딸이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다니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먹어치우는 사이 금발의 우아한 미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말한 아그네스였다. 나는 아그네스를 붙잡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절박한 심정을 담뿍 담아서, 왜 여기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부담을 가질까 어쩔까 넉살 좋게 덧붙였다.
"저는 정원에서 자면 돼요. 저기 그네의자가 있던데 오늘 거기서 신세를 좀 져도 될까요? 저한테는 침낭도 있으니까 그냥 벤치만 빌려주시면 감사해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 할아버지 댁의 거실이 적잖이 널찍해 보였다. 이 소파를 두고 설마 나를 바깥에 재울까 싶은 계산도 슬그머니 든 게 사실이었다.
어느새 샌드위치를 먹어치우고 홍차를 홀짝거리며 다 비우고 욕실 이용까지 끝낸 찰나였다. 그러자 잠자리를 봐주겠다며 아그네스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자야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괜히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30분 전만 해도 기적이라며 속으로 폴짝폴짝 뛰던 게 나였다. 그새 슬그머니 안락한 거실에서 어떻게 하룻밤 좀 안되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 것이다. 이래서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내 섭섭한 마음을 지우고,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길바닥 모드로 재빨리 되돌아갔다. 나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선 배낭을 열어 침낭을 꺼내고, 휴대용 베개에 바람을 넣고 번개처럼 잠잘 채비를 마쳤다. 벤치는 널찍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능금나무 바로 아래서 잠을 잘 수 있다니 로맨틱한 밤이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곳과 저곳일 뿐인데, 내가 자리한 이 곳은 더없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나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계획은 어긋났어도 오늘도 해 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환희로 잔뜩 부풀어 올랐다.
"혹시 오늘 밤에 비가 올지도 몰라요. 비가 오면 저기 있는 차고로 들어가서 자면 돼요. 거기에도 의자가 있어요."
아그네스는 여기서 정말 괜찮겠냐고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할아버지와 아그네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벤치에 누워 침낭 속으로 쏙 하고 들어가니 따뜻한 거실 부럽지 않았다. 밤공기가 조금 눅눅하다 싶었지만 '안전'한데다 심지어 '낭만'도 있었다. 진심으로 5성급 호텔 따위가 부럽지 않은 밤이었다.
잠시 눈을 붙였나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후드득후드득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눈을 떠 보니 아그네스 말 마따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얼른 헤드랜턴을 켜고선 재빨리 배낭을 꾸리고 침낭을 돌돌 말아 벤치에서 철수했다.
차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긴 안락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잠이야 안락의자에서 자면 되겠지만 차고의 공기가 너무 탁했다. 페인트 냄새도 나는 것 같고, 기름 냄새, 화학약품 냄새 등등 각종 불쾌한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쥐가 나와 돌아다녀도 위화감이 없을 분위기였다. 사과나무 아래의 벤치가 그리웠지만 비를 피하자면 도리가 없었다. 안락의자 위에다 침낭을 깔고서 다시 잠을 청했다. 막상 자리를 잡고 누우니 바깥보다 공기도 포근한 게 또 그럭저럭 잘만 하다 싶었다.
다시 깜빡 잠이 들었던 찰나, 이번에는 아그네스가 램프를 들고 차고로 들어왔다. 비가 와서 나와봤다며 내 잠자리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아그네스는 못내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더니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고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다시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담요와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아그네스는 차고 밖의 정원에 주차되어 있는 SUV 차량의 뒷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차고보다 여기 차에서 자는 게 더 편안할 거예요."
그러고는 차 뒷좌석에 담요를 깔고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한결 안락해진 침낭 속에서 아그네스가 가져온 또 다른 담요를 푹하고 덮어썼다. 그제야 아스네스는 안심이 되는지 따뜻한 차를 내려놓고선 사라졌다. 확실히 차 안은 따뜻하고 불쾌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오늘 히치하이킹 여정은 아침부터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한 막막한 상황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또 그걸 하나씩 하나씩 헤쳐나가다 보니 이름도 모를 낯선 곳, 아름다운 정원에 주차된 차 뒷좌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 나를 도와준 길 위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또 이렇게 무사히 하루가 가는구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곧 정신없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완벽했던 하룻밤, 그보다 더 완벽했던 아침
"똑똑똑"
누군가 차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순간 여기가 어딘가 어리둥절했다. 정말이지 간밤에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잤다. 차 뒷문에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내가 깨는 모습을 보더니 부끄러운지 얼른 집으로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너무 단잠을 잔 터라 바로 일어나기가 아쉬웠다. 비 온 뒤 시원한 아침 정원 공기를 흠뻑 마시며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잘 잤어요? 집에 들어와서 샤워하고 아침 먹어요."
아그네스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잠자리를 정리하고 재빨리 배낭을 챙겨 들고서 아그네스를 따라나섰다. 아그네스는 할아버지 내외분이 사는 별채가 아니라 본채로 나를 안내했다.
"남편은 벌써 출근했어요. 8살짜리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오늘부터 여름캠프에 참가한다고 일찍 나갔네요.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씻어도 돼요. 참 샴푸와 수건은 다 욕실에 챙겨뒀어요."
널찍하고 아늑한 집 안에는 아그네스와 나 그리고 어제 산책 도중 만났던 강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넓고 고급스러운 욕실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고 있노라니 간밤의 모든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다.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1). 생각지도 않았던 호사를 누리는 중이었다. 최대한 깨끗한 옷으로 다 갈아입은 뒤 말끔해진 모습을 하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또 한 번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주방 식탁에는 상 가득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바게트와 버터, 치즈, 크림, 잼, 요거트. 그리고 총총히 썰려 있는 과일과 채소, 입에 넣으면 고소하게 녹는 케이크까지. 내가 식탁에 앉자마자 아그네스는 갖은 과일과 채소를 넣어 갈아 만든 건강주스를 내어 주었다. 커피머신은 드륵드륵거리며 내가 주문한 신선한 카페라테를 뽑아내고 있었다. 나의 먹성은 정성껏 밥상을 차려준 아그네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엄지를 추켜올린 채 눈 앞에 것들을 맛있게 양껏 흡입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아그네스는 그저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배가 부르다며 접시를 다 내 쪽으로 밀어 놓고 있었다. 빈 접시들에는 뭔가가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깨끗하게 씻고 나서 맛있고 신선한 음식을 먹고 있자니 정말 행복감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아그네스는 내 여행 이야기를 몹시 궁금해했고 그만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만나본 첫 번째 한국인이 바로 나라며 무척 신나했다. 자신의 딸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매우 좋아했을 거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저 차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는 노숙자 손님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더란다. 깨워서 인사하고 싶다는 걸 겨우 말렸다고 했다.
아그네스의 남편 역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데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 그러지 못해 아쉬워했단다. 그녀의 남편은 변호사인데 늘 일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아그네스가 출근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실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는데 아침 일찍 고객과의 약속이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라 하마터면 그녀는 약속에 늦어 버리게 생겼다.
아그네스와 나는 얼른 나갈 채비를 차렸다. 아그네스는 출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가는 길에 먹으라며 먹거리들을 바리바리 싸주기 시작했다. 생수, 주스, 사과, 배, 초콜릿, 에너지바, 케이크 등등 배낭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크라코우에 갔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우리 집에 들러줘요. 딸이 무척 좋아할 거예요. 그때는 우리 집 안에 따뜻한 곳에서 재워 줄게요."
아그네스의 따스한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다시 들르고 싶었다. 하지만 유명한 도시도 히치하이킹으로 겨우 도착할까 말까인데, 우연히 들른 이 작은 마을에는 얼마나 운이 좋아야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일까. 아그네스는 고속도로 갓길에 나를 내려주고는 서둘러 일터로 떠났다. 정신없이 바삐 나오다 보니 어제 나를 구해 준 할아버지 내외분께 작별 인사도 못 드리고 말았다.
마치 꿈만 같던 지난밤이었다. 해는 저물었고 낯선 곳에 떨어져 무척이나 황망하고 난감했었다. 그런 찰나 내 작은 소망이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나의 바람처럼 진짜로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안전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전혀 기대치도 못 했던 따뜻한 샤워와 푸짐한 아침식사까지 덤으로 받고 보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황홀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가장 난감했던 밤이 가장 완벽했던 밤으로 변신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