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30분, 집을 나섰다. 종로 1가에서 남산 순환버스를 타면 내가 좋아하는 남산타워까지 하나도 힘 안 들이고 올라갈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남산에 가고 싶으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복잡한 광화문, 시청 거리를 이리저리 비켜가며 남산공원 아래에다 주차를 했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걸음으로 올라가야 했다. 운동하고 걷고 다 좋은데 다만 아쉬웠던 한 가지는 야경을 등 뒤에다 둬야 하는 거였다. 순간순간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봐야지만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이 아름다운 광경을 양껏 볼 수 없다는 게 늘 아쉬웠다. 게다가 자전거다 뭐다 올라가는데 진을 뺀 나머지 집으로 돌아올 때쯤엔 푹 절인 배추처럼 버스에 실렸다. 어느 날 문득, 잠깐만 이거 너무 비효율적인데 차라리 버스로 올라갔다가 걸어 내려오는 편이 낫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동생과 함께 길을 나섰다. 목요일 밤 광화문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10분도 넘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저기 노란색 번호판을 단 남산행 버스가 승강장 끄트머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복잡한 버스 틈바구니에서 행여라도 지나칠세라 손을 번쩍 들어 올려 기사님에게 간절한 신호를 보냈다. 이게 배차간격이 20분이나 되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지난번에는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이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고 무려 4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종로 5가, 동대문을 지나 드디어 남산 초입에 들어섰다. 이 시각 남산을 향하는 이들은 외국인 커플까지 해서 총 다섯이었다. 차츰차츰 서울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꼬불꼬불한 일방통행길을 천천히 달리고 있으니 마치 전세 버스로 관광을 떠난 기분마저 들었다. 드디어 남산타워가 눈앞에 우뚝 드러났다. 서울 한 귀퉁이에서 바라본 남산타워는 늘 조그마하고 귀여웠는데 막상 코앞에서 보면 그 거대함에 새삼 내가 알던 그이가 맞나 어쩌나 놀라게 된다.
남산 정상에 서면 서울시내 야경이 사방팔방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내가 아는 한 남산은 서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이다. 매일 인왕산에서 남산을 건너다보았었는데, 이번엔 남산에서 인왕산 성곽을 따라 꾸불꾸불 놓인 불빛을 보는 기분이 색다르다. 적당히 감상을 끝낸 뒤 하산을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버스에서 9시 33분에 내렸으니 다음 환승시간인 10시 33분까지는 버스를 타야 한다.
역시나 이거였다.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서울 야경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 270도 각도로 눈앞에 드러났다. 이제는 멈출 필요도 뒤를 돌아다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발밑만 주의하며 내려가면 된다. 여전히 기운은 남아있고 내리막 길은 몹시도 수월하다. 저 좋은 경치를 등지고 숨을 헉헉대며 올라오는 사람들이 좀 안돼 보이긴 했다.
버스에서 동생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최근 인상 깊게 읽었다며 '깨달음 이후 빨랫감'이라는 책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며 화두를 던졌다. 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릎을 쳤다. 인도와 한국의 명상센터를 전전하면서부터 내가 두서없이 고민하던 바를 저자는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글쓰기는 어떻게 도움이 될까, 동생과 나는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돌계단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백범공원에 도착했다. 빌딩 불빛은 더 이상 저 멀리 반짝거림이 아니라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현실로 바뀌어 있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남대문에 이르렀다. 인적 없는 불 꺼진 남대문 시장은 을씨년스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범지대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10시 20분,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환승 성공!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할 것이고 2시간 남짓한 남산 나들이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언제라도 교통카드 한 장 달랑 들고 집을 나서면 서울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남산에 다녀올 수 있다. 1400원의 행복, 야경도 함께 나눈 이야기도 달처럼 환히 내려앉은 짧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