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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Mar 05. 2021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면 좋겠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아직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서울 친구들도 있으니 그들에 비하면 아주 이른 나이에 독립한 셈이다.

17살 봄,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으로 집에 전화를 하려던 밤이었다. 중앙현관에 단 한대 놓인 공중전화 앞에는 이미 기숙사생들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앞에서 전화를 걸던 친구들 몇몇은 웬일인지 수화기를 잡고 울먹울먹 대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내 차례가 다가왔다. 

따르르릉, "엄마~" "응 그래, 산이라?" 수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만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엄마가 기숙사 생활이 괜찮냐고 물어오는데,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으으응 대답만 하고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 깜깜한 길에서 엉엉 울어 젖혔다. 갑자기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고, 엄마 곁에 있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게 내가 부모님을 그리워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후로는 부모님을 찾지도 딱히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내가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건 서른이 훌쩍 넘어서였다. 

할머니 병구완을 위해 포르투갈에서 급구 귀국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몇 달을 지냈었다. 처음 몇 개월은 매일 병원에서 지내느라 부모님과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후 할머니가 퇴원했고 나 역시 집에 머물렀기에 부모님과 마주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게 상당히 갑갑했다. 나의 부모님이고 좋은 분들이고 어쩌고를 떠나, 이십 년간 떨어져 지낸 어른과 함께 생활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야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들도 일흔이 가까웠다. 나는 하루 종일 어르신 세명을 마음 쓰고 챙기느라 몸도 마음도 빠르게 지쳐갔다. 좀체 대화를 나누고 정서를 교류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은 내 생각만큼 그렇게 노인이 아니었고 마냥 보살핌이 필요한 분들도 아니었다. 엄마와 아부지는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취미활동도 하는 당신들 나름의 바쁜 개인 생활이 있었다. 그걸 인지하자 부모님을 대하는 내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더군다나 다시 학생 신분이 된 나는 비교적 개인 시간이 많아졌다. 고향에 내려갈 적마다 일주일씩, 한 달씩 예전에 비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할머니가 주간 요양보호소에 가시고 나면 엄마, 아부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면 두 시간씩 함께 고스톱을 쳤다. 자연스레 부모님과 웃고 부대끼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시간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증가했다. 그러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인간적인 면들을 하나씩, 둘씩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인간적으로 종종 감탄을 연발했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 두 가지였다. 

일단 부모님은 남에게 뭘 시키는 법이 없으셨다. 간혹 밥상에 간장이 안 올라왔으면 아랫사람을 부릴 법도 한데 당신이 얼른 일어나서 가져오신다. 물 컵이 필요하다 싶으면 밥을 드시다 말고 또 퍼뜩 일어나서 가져오신다. 아부지도 엄마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분이 똑같으시다. 가뜩이나 엄마는 무릎이랑 허리가 안 좋은 터라 좀 가져다 달라 부탁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를 않으신다. 그럴 때마다 내가 요량껏 바람보다 빠르게 일어나서 냉큼 가져오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필요한 거나 남이 필요한 거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단 당신들이 일어나고 본다. 밥상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랬다. 부모님은 늘 부지런히 먼저 움직이셨다. 어떤 일에 건 솔선수범하시되,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는데도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시키거나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법이 일절 없으시다. 이건 며느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웬만해서는, 아니 아예 시키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건 부모님이 상대의 취향을 존중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냥 존중이 아니라 엄청나게 최대한 존중해준다고 보면 맞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밥에 콩이 섞여 있는 걸 싫어했다. 팥이나 콩처럼 이렇게 큰 것들이 밥에 떡하니 들어가 있으면 입안에서 걸리적거리고 게다가 단맛까지 나서 짭조름한 반찬들과는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콩이 몸에 얼마나 좋게?" 한 말씀할 법도 하지만, 부모님은 나의 기호를 100프로 아니 120프로 존중해 주셨다. 엄마는 밥을 풀 때 절대 내 밥그릇에는 콩을 섞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내 밥에 콩을 섞어 놓으면, 엄마나 아부지는 아무 말씀 없이 덜어가곤 하셨다. 또 떡국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설날에는 일부러 밥을 따로 지어 주신다. 비단 나 하나에게만이 아니라, 부모님은 다섯 자녀의 취향을 모두 일일이 존중해 주신다. 이게 어떻고 저게 어떻고 일체의 가르침도 잔소리도 없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신다. 콩이 싫다고 일절 콩을 안 주는 부모님인데 하물며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가 있으랴 싶을 정도다. 떠올려보면 부모님은 여태껏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기다, 아니다 반대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지켜봐 주셨다. 그렇다고 관심이 없으신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특히 아부지는 보통의 경상도 아부지들과는 달리 외향적이고 쾌활하고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에다 활동적이시다. 아이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오늘은 뭘 했나, 어디 있나 관심이 무척 많으시다. 엄마는 좀 다르긴 하다. 우리 엄마는 자녀들이 집에 내려갈 적마다 하나라도 더 해서 먹이려고 애쓰지만 그렇다고 딱히 누구에게 애착을 보이거나 그러진 않으신다. 보통 할머니가 되면 손자, 손자 입에 달고 산다는데 우리 엄마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손자들이 오면야 잘해주지만 안 보이면 일절 찾는 법이 없으시다.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부모님의 이런 면들이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나야 입으로는 역시 아이들은 놔두면 스스로 잘 알아서 클 거라고, 본성대로 잘 자라는 게 최고라고 주장해 대지만 막상 조카들만 마주쳐도 사뭇 달라진다. 수시로 버르장머리를 찾고 한소리를 걸쭉하게 시전 한다. 다그치고 소리 지르다 못해 간혹 쥐어박을 때도 있다. 나한테 자식이 있었더라면 아마 수시로 이 잡듯이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시키지도 않고 취향을 무조건 존중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누구보다 멋대로 성장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나는 결코 아이들에게 그런 자유를 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 자꾸만 걱정하고 매사 전전긍긍할 것 같다. 그럴수록 나는 부모님이 더더 위대해 보인다. 자신이 애정을 쏟는 누군가를 그게 심지어 자식이라면 그를 가만히 놓아주고 지켜봐 주고 삐딱하게 가더라도 믿고 바라봐줄 수 있겠는가? 이건 용기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 같다. 나처럼 까칠하고 잣대 들이대길 즐기는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는 궁극의 자기 수련의 결과이자 어떤 면에서는 득도의 경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만약 부모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자식을 소유물이 아니고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고 순수하게 존중할 대상으로 봐주는 부모라면, 그들의 자식들은 일단 큰 복을 하나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그런 부모님이 계셔서 얼마나 큰 행운인지,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비록 나는 여태 부모가 되지 못했지만, 이론상 부모의 롤모델을 제시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언제라도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부모님이 나를 교육한 그대로만 자식들에게 해 주면 그거면 충분히 넘칠 거라는 자신감이 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해 낼 수 있느냐 아니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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