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 계속되던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디쯤에서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산길을 헤매었던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자전거 일주 중이었다.
인적 없는 산에서 갈림길을 만났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좌절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쓰러진 표지판이 가리키고 있는 좁은 오른쪽 길로 갈 것이냐, 바퀴 자국이 보이는 너른 왼쪽 길로 갈 것이냐. 확률은 반반이었다. 나는 왼쪽 길을 택했다.
폭이 널찍하던 길은 머지않아 바퀴 자국과 함께 사라졌다. 시골 밭두렁처럼 폭이 좁아진 길에는 풀이 내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 못 택한 것 같다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제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깊은 산중, 거의 울음을 집어삼키며 자전거에 올라 허겁지겁 내달리고 있었다.
두 시간도 훨씬 지났을 무렵, 저 멀리서 희미하게 자동차 소리 비슷한 게 들려오고 있었다. 덩달아 내리막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풀과 돌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제발 자전거 브레이크가 파열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눈 앞이 탁 트였나 싶더니, 어느 터널 꼭대기에 서 있는 나와 자전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기쁘면 웃음도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자전거를 끌고 터널 아치를 따라 내려갔다. 높고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었지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할 만큼 흥분상태였다. 드디어 무사히 땅에 안착했다. 살았구나!
군불이라도 땐 듯 절절 끓는 아스팔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산악 레이스를 펼친 자전거에게 휴식을 줄 겸, 나는 물을 마시며 잠시 안정을 취했다.
열기는 점점 뜨거워져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야 할 길이 앞에 주야장천 펼쳐져 있으니 어쨌거나 계속 가야 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며 다시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왜 이렇게 자전거가 안 나가지?"
다행히 타이어도 체인도 이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페달을 밟는데 힘이 잔뜩 들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얼른 자전거 핸들을 꺾어 방향 전환을 한 뒤 반대편으로 가 본다. 역시나 페달링 없이도 자전거가 설설설 기어 내려가고 있다. 그랬다, 나는 지금 오르막 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참 신기한 게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면 이게 오르막인지 잘 몰랐다. 편평한 길로 보이는데 어찌 된 게 페달이 안 밟히고 무척 힘이 든다 싶으면 십중팔구 오르막 길이었다.
'대한민국 영토의 70퍼센트는 산이다'라는 사실을 자전거 일주를 시작하면서 절감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왜 이리도 오르막이 많은지 몰랐다. 그놈의 '오르막 시작'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볼 때마다 주저앉고 싶었다. 피할 수도 없는 이 길을, 어차피 곧 내리막이 나타나 모든 걸 상쇄해 버릴 이 길을 또 죽어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오르막차로 시작'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 안내가 보이면 아주 길고 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오르막이 네 코 앞에 나타날 거란 의미였다. 자동차로 다닐 때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오르막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부터 원망하기 시작했다. 오르막차로는 피하고 싶은 원수였다.
평소 같으면 좌절감에 휩싸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대상도 딱히 없는 화가 어쨌거나 잔뜩 밀려와 입으로 오만 욕을 중얼중얼 내뱉으며 자전거를 몰았을 것이다. 장마는 장마대로, 땡볕은 땡볕대로,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오전 내내 산을 헤매느라 몸도 마음도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왠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스팔트 위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서 좋았다. 무사히 살아 있을 수 있다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있을까.
나는 묵묵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내 발 끝만 쳐다보았다. 간간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주시하곤 했지만, 여전히 모든 마음과 시선은 발끝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어느 순간 페달이 뱅글뱅글 가볍게 돌기 있었다. 천년만년 계속될 것만 같던 오르막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오르막 차로 끝' 표지판이 나타났다. 자전거는 다시 미끄러지듯 도로를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올라온 만큼 다시 내려갈 것이다.
현실이 너무 힘들 때 깜깜하도록 끝이 보이지 않을 땐 묵묵히 발끝을 봐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느리더라도 고되더라도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아파와도 한 바퀴 한 바퀴 페달을 돌리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었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가야 할 길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 길이 너무 길다 싶을 땐, 그저 지금 굴리고 있는 한 바퀴 한 바퀴에만 집중해도 된다. 짧은 길이 모여 막막하던 길을 굴리며 채우며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 짧은 끝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언제고 나의 길고 긴 여행이 끝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