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되었을까요?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가 봤더니 저희 집 빈 화분에 새끼손가락보다 더 야리야리한 상추가 돌래 돌래 심어져 있더라고요. 짐작을 했죠. 윗집 아주머니가 심어주셨구나. 그날부터 상추 돌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급작스레 윗집 아주머니가 이사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선물이라며 자소엽(잎 뒷면이 보라색인 깻잎)과 방아도 몇 포기 주더라고요. "상추는 물만 잘 줘도 잘 자라요. 물 듬뿍 주고 키워요." 얼떨결에 받아 들고 보니 봄 식구가 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커다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들고 옥상으로 뛰어나갑니다. "잘 잤어?" 아기 상추와 아기 깻잎 그리고 아기 방아에게 물을 주며 아침인사를 건네는 걸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그런가, 밤공기가 쌀쌀해서인지 양껏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 인간(?)이 되려나 궁금해집니다.
시장에 나가 대파를 한 단 사 왔다가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이 뿌리를 심어보자! 한 뿌리씩 한 뿌리씩 먹을 때마다 옥상으로 들고 가 심어뒀습니다. 어느새 가운데에서 새파란 심이 힘껏 솟아오르고 있네요. 귀여운 녀석들. 이제 상추, 방아, 자소엽, 대파까지 매일 이 녀석들 자라는 걸 지켜보는데 재미가 들렸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옥상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대파가 뿌리째 뽑아져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누가 대체 이런 걸까, 이럴 사람이 없는데 싶어 황당했습니다. 얼른 제자리를 찾아 흙으로 이불 덮듯 꼭꼭 눌러 덮어주었습니다. 물도 듬뿍 주고요. 얼마나 놀랐을까요?
다음날 아침, 옥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엔 옆에 두었던 화초도 뿌리째 나뒹굴고 있잖겠어요? 아니 또 이런 일이. 언제 뽑힌 건지 뿌리가 바짝 말라 있습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개를 데리고 옥상에 올라오는 아래 아랫집이 의심스럽습니다. 기분이 확 나빠집니다.
그다음 날 아침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곰곰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범인이 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개가 저지래를 했으면 주인이 가만 뒀을 리가 없겠죠. 개의 소행은 아니지 싶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범인을 잡아보자 싶어 옥상으로 박차고 올라갔습니다. 범인은 보이지 않고, 역시나 이번에도 대파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분노 게이지가 차 오릅니다. 바닥에는 화분에서 튀어나온 흙도 떨어져 있고 그 사이 새 똥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쪽 건물 옥상에 새 무리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게 보입니다. 범인은 쟤들이다! 저 녀석들이 화분을 쪼고 대파를 뽑고 상추를 뜯고 한 것 같습니다. 심증이 굳어진 순간입니다.
그날부터 새들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심고 새는 뽑고, 술래잡기입니다. 매번 술래는 저입니다.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놔 봐도 사흘 뒤면 녀석들에게 발각되어 또다시 제 귀여운 대파며 화초가 뽑힙니다. 이제 화초는 잎사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아하던 모습이 볼품없이 변한 걸 보니 피눈물이 납니다. 망연자실, 대노, 격노, 자포자기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부셔버리고 싶다...
나흘 전 저녁, 집에 있는 나무젓가락 한 뭉텅이를 꺼내 들었습니다. 나무젓가락 끝을 침처럼 가늘게 깎아 들고설랑 의기양양 옥상으로 향했습니다. 화분 둘레둘레, 특히 대파 주위로 나무젓가락을 하나씩 꽂아 두었습니다. 이만하면 함부로 덤비지는 않겠죠?
다음 날 아침, 기대는 보기 좋게 날아갔습니다. 나무젓가락 하나와 더불어 대파가 바닥을 뒹굴고 있더라고요. 머리 끝으로 피가 몰렸습니다. 분노의 뜀박질을 하며 집으로 쫓아내려 왔습니다. 즉시 나무젓가락 총동원령을 내렸지요. 일회용 포크의 참전도 허락했습니다. 전쟁입니다.
대파 한 뿌리를 지키는 나무젓가락 병사는 최소 둘입니다. v자를 그리며 광화문 지키듯 굳게 지키고 섰습니다. 화초며 상추며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마방진 부럽잖은 파방진을 쳐 두었습니다. 함부로 대가리를 들이대다가는 모가지에 아주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근데 제가 파를 키우는 걸까요, 나무젓가락을 키우는 걸까요. 어째 헷갈립니다.
갑자기 날씨가 여름으로 대변신했나 싶더니 물을 잔뜩 머금은 상추와 대파와 그리고 방아가 하루하루 몰라보게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보드라운 잎사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집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게 이 맛에 식물을 키우나 봅니다. 날씨만 안 더우면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지켜만 보고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옥상에는 평화가 감돌고 있습니다. 새 무리가 겁을 집어 먹은 것인지 어쩐지 여즉 소식이 없네요.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녀석들은 저의 예상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거든요. 새벽으로 밤으로 수시로 물을 한 바가지씩 들고 순찰을 돌러 나갑니다. 다행히 오늘 밤엔 비가 내려서 이만 발 뻗고 자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