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법: 전체를 먼저 꿰뚫어라

by 김커선

두 주간 계속되던 시험기간이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학교에 재입학할 때만 해도 삼십 대였는데, 졸업을 앞두고 보니 사십 대가 되어 있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부산히 움직이기 바빴던 여행자의 삶이 어느 날부터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걸로 바뀌었을 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일이 강의 듣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몸이야 그럭저럭 괜찮은데 하굣길이 되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늘어져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육체노동 없이도 이렇게 피곤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었다.


이십 대 때는 몰랐던 학문의 즐거움을 이제야 비로소 차츰 알게 된다. 인생살이에 다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마흔 줄에 접어든 나에게는 지금이 공부할 적기인 듯싶다. 공부가 재미있고 좋긴 한데 문제는 기억력이다. 시험 때가 닥치면 눈에 글자를 바르는 지경이 된다. 정신없이 들어왔던 지식은 시험이 끝난 뒤 정신없이 빠져나갔다. 열심히 이해했던 많은 것들을 당장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게 그래서 필요할 때 활용하지 못하는 게 참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우리 단과대 교수님들은 대체로 시험을 시험답게 내는 경향이 있다. 객관식, OX문제도 적절히 섞이지만 주는 주관식 서술형 문제여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 답을 적어내기가 어렵다. 그동안은 주변의 도움을 적절히 받아가며 어떻게 버텨왔다. 족보라는 것도 돌아다녔고, 몇 날 며칠 고생하며 만든 자료를 보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족보 몇 장만 보고 들어간 시험에서 기막힌 적중률을 기록하며 노력에 비해 과분한 학점을 받기도 여러 번이었다. 사실 족보라는 것도 어떤 건 그 양이 책 한 권 두께여서 어떤 족보를 취사선택하느냐도 관건이고, 또 그걸 단시간에 공부해 내는 것도 관건이긴 하다.


문제는 이번 학기였다. 4학년에 개설된 전공과목은 약물학 하나 빼고 다 수강한지라 타 학년, 타 과에 개설된 강의 중 재밌겠다 싶은 것들을 신청했다. 면역학, 내분비학, 약물동태학, 약학통계학, 병태생리학, 한방생병리학 등등 녹록한 과목이 없었다. 개중 양생학과 상한론 정도는 좀 만만하기는 했다. 아무튼 안 그래도 아는 이 하나 없는 수업인데, 그마저 비대면이라 뭘 어디 물어 볼 데도 마땅치 않았다. 시험시간도 나 혼자만 모르고 있는 지경인데 족보 같은 건 언감생심이었다.

기말고사가 코앞에 닥쳤고 몇몇 과목은 중간고사를 생략한 덕분에 시험분량이 책 한 권이었다. 미리 공부해 놓아야 한다고 마음만 앞섰지, 다른 과목을 공부하다 보면 금세 다 잊어버려서 책을 펼 때마다 새로웠다. 일신 일신우일신, 매일매일 새롭고 또 새롭다.

시험은 낼 모래지, 방대한 분량에 짓눌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이 방법도 써보고 저 방법도 써보며 포기도 고려하다가 마침내 효과적인 공부법 하나를 발견해 냈다. 오늘 이 방법을 시험해 본 결과 빵점은 면할 수 있었다. 빵점을 면하게 한 그 공부법이라는 건 바로 전체를 먼저 꿰뚫는 방법이었다.


외워야 할 정보량이 너무 많을 땐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다. 이해를 위주로 공부하다 보면 각각의 챕터가 분절화되어 곧 지식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뒤로 가면 갈수록 숫제 이걸 어디서 봤는지조차 헷갈리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그 지식을 꿰줄 긴 실이 하나 필요하다. 그게 바로 전체 그림이다.

내분비학을 공부하며 일단 전지 크기의 종이를 한 장 마련했다. 거기에다 호르몬이 어떤 식으로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흘러가는지 모식도를 그려 넣었다. 중추신경(CNS)이 내외부 자극을 인지하는 것부터 출발해 시상하부(hypothalamus)를 지나 뇌하수체 전엽(anterior pituitary gland)과 후엽(posterior pituitary gland)에 이르면 이제 각각의 분비샘에서 나오는 호르몬들을 아래에다 적으면 된다. 이 호르몬들의 타깃 조직을 아래에 적고 마지막으로 각 호르몬의 간단한 기능을 채워 넣으면 전체 그림이 완성 끝! 이제 이 그림을 머리에 쏙 집어넣어 넣으면 모든 기초공사가 끝이 난다. 각론으로 들어갈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아무리 각각의 디테일한 정보가 쳐 들어와도 별로 겁낼 게 없다. 전체 그림 사이사이에다 적으면 된다. 이렇게 습득한 지식은 곧바로 휘발되지 않고 고스란히 뼈대에 살이 되어 남는다.

그간 공부할 때마다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뜨면 잊어버리곤 했는데, 이런 방법으로 습득한 지식은 똘똘한 아이처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자리를 제대로 알고 찾아갔다. 전체 그림 하나만 그렸을 뿐인데 효율이 수배가 되고 기억도 오래갔다. 비단 내분비학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도 어떤 식으로 쌓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힌트를 얻은 셈이다. 생각건대 이는 공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도 적용해 보면 경험이 축적되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비로소 시험 잘 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서야 집이 소중한 걸 알고, 사랑이 끝나서야 사랑하는 법을 알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인생 사는 법을 알게 되는 삶의 또 다른 이치란 말인가. 그나마 공부가 한 학기 남아 있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아직 남은 시험에다 이 공부법을 적용해 봐야겠다. 혹시 몰라 노파심이 나서 그러는데, 그렇다고 내가 시험을 잘 봤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건 꼭 밝혀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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