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파란 신입사원이던 시절 지점장님이 물어왔다. 조언과 충고의 차이라... 급작스럽다. 글쎄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둘이 똑같은 거 아니에요? 아아, 조언은 듣는 사람이 기분 안 나쁘고, 충고는 듣고 나서 기분 나쁜 거 아닌가요? 아닌가? 음... 잘 모르겠는데요 지점장님."
지점장님은 회사 인사교육팀에서 근무한 전적이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분기별로 전 직원 교육을 책임졌었다. 그 시절 어리바리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박주임은 농담을 빌린 진담처럼 당시 지점장님의 자자하고 높았던 악명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있잖아, ..."
우리 지점장님은 사탕발림 표현 따윈 상상조차 어려운 지극히 냉정하고 날카로운 언변의 소유자였다. 냉혈한이라는 소문도 돌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란 소리도 있었다. 지점장님은 그런 뒷말을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쿨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겪어 본 결과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학연, 지연, 인정에 얽매이지 않는 이성적인 타입이었고, 점심값을 두고 신입사원과도 '네가 사라! 내가 사랴?' 합리적 토론을 즐기는 타입이라 그렇지, 우리 지점장님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말도 좀 재수가 덜하게 하고, 정이 없게 얘기한다 뿐이지 사람 뒤통수를 친다거나 뒤에서 수작을 편다거나 하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누구와도 지킬 선은 칼같이 지키는 깔끔한 양반이었다.
나는 지점장님과의 토론을 즐겼다. 말이 토론이지 나는 주로 논리적으로 무참히 깨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엔 사람을 왜 이렇게 들들 볶는지 화가 터져 나왔지만 대개의 상황과 사람이 그러하듯 적응하기 나름이었다. 울컥하는 감정을 잠시 접어두면 그 과정 자체가 교육이었다. 차분히 지점장님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허투루 꺼낸 말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걸 물어봐도 지점장님은 상대가 충분히 납득이 가게끔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강요나 억지 따위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지정장님은 아이디어 뱅크라 생각될 정도로 늘 새롭고 발전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새로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논리는 저런 식으로 전개해야 하는구나, 합리적 사고가 저런 거구나, 공적인 사이에 선은 저렇게 지키는 거구나, 역량을 키우려면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구나...’
나는 사회생활의 필수 덕목들을 무의식적으로 지점장님으로부터 습득하고 있었다. 이때 좀 잘못 배운 것도 같은 게, 상대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나는 해야겠다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무례를 저지를 때가 있다. 사실 많다. 알면서도 그러는 게 참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다. 이게 다 우리 지점장님 탓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인 것이다.
지점장님은 퀴즈 인양 먼저 질문을 던져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해야 했고 되든 안 되든 의견을 내놓아야 했다. 신입사원 교육에 이보다 훌륭한 지점장님은 없을 것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과의 대화가 좋은 건 격식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비록 상대가 직급이 한참 낮더라도 타당한 의견이다 싶으면 그걸 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관된 합리성이 있었다. 이런 지점장님 덕분에 "모르는 건 모른다, 알면 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등등 나는 천지분간 못 하고 내키는 대로 의견을 개진할 때가 많았다. 한 때 비인간적이기로 악명 높았다던 지점장님은 이런 부분에서 비인간적이리만치 넓고도 큰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이 날도 지점장님이 어디서 조언과 충고에 관한 잠언이라도 읽은 모양이었다.
"조언과 충고의 차이는 말이지, 잘 들어봐. 상대가 청할 때 하는 건 조언이야. 반면 상대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하는 건 충고야. 너는 그 둘을 잘 구분해라."
무심한 듯 건네던 지점장님의 정답은 신입사원의 뇌리에 아주 깊이 박혔다. 이게 벌써 15년 전 일이다.
조언은 괜찮지만 충고는 말자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나는 참아야 될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을 때가 많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휘두른 충고 폭격에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이 십년지기 친구는 잘 나가는 커리어를 포기하고 업종 전환을 위해 거금을 투자해 외국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한 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코로나 대유행이 닥쳤다. 친구가 구직하던 직종에서는 당장 있는 사람도 잘라내는 판국이라 신규인원 채용은 꿈도 못 꾸는 지경이다. 얼어붙은 구직 시장이 언제 정상화될지 기약 없으니 취업은 깜깜하기만 하다. 스무 살 시절부터 친구가 간절히 바라며 꿈꿔 왔던 일이 바로 문턱에서 좌절될 까 봐 내 마음도 좋지 않다. 나 역시 깜깜한 길을 지나왔던지라 친구의 답답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얼른 다른 대안이라도 찾아 나서야 할 시기인데, 요즘 친구는 조카를 돌보기 위해 지방에 내려가 있다. 정작 자신은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다 큰 조카의 등하교까지 책임지고 있다니 듣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나는 친구가 청하지도 않은 말을 다짜고짜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건 부모가 책임져야 할 일 아닌가? 부모가 휴직이라도 해서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네 애도 아닌데 그걸 너한테 맡기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본다. 너는 남을 돕고자 하는 성향이 강해서 부탁을 거절하면 되려 그게 더 마음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염려하는 건 이거야. 나중에 돌아봤을 때 네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중요한 시간에 정작 너 자신을 소홀히 했다는 자괴감이 들까 봐 그래. 내가 울 할매 병간호하면서 그랬잖아. 남을 신경 쓰다 보니 내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줄도 몰랐고 그걸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더라고."
친구는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설명을 하는데 그래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남의 가정일에 내가 납득하고 말고가 하등 의미 없는 일이었다. 뭣도 아닌 내가이러쿵저러쿵했으니 듣는 입장에서 얼마나 곤혹스러웠겠는가?내가 친구를 위한다고 했던 말은 결과적으로 친구의 심기를 더 어지럽히기만 했을 뿐이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해서 돌아오는 내 마음이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의견을 제시해도허공으로 흩어질 말이었다. 청한 이가 없으니 당연 듣는 이가 없을 말들이다. 그런데그렇게까지 안달복달 떠들어 댔는지 허무하기까지 하다.
결국 충고란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하지 말아야 될 말이었다. 필요하다고 해서 뱉은 말이었지만 당장 내 마음이 불편해 오면 그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고 하지 말았어야 될 말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부모님께 가장 감사드리는 바는 바로 간섭 없이 키워주셨다는 점이다. 부족하고 어리석은 어린 자식이 오만 시행착오를 겪으며 비틀거려도 부모님은 묵묵히 지켜만 보셨다. 단 한 번의 간섭도 없으셨다. 그 덕분에 비록 순탄치는 않았어도 나는 내 뜻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내렸으며 그 책임 또한 스스로 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자랄 수 있어 어찌나 운이 좋은지 모르겠다고 떠들어 대면서 정작 나는 왜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나 자신의 성장은 자기 스스로 해 나가야 한다. 비록 옆에서 보기에 답답할 수도 있고 지름길이 훤해 보일 때도 있지만 청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알은 스스로 깨고 나와야 숨이 깃들고, 꼬치는 스스로 벗고 나와야 날개가 펴지는 법이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이에게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청할 때 하는 건 조언이야. 반면 상대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하는 건 충고야. 너는 그 둘을 잘 구분해라."
15년 전 존경하는 지점장님이 들려준 말씀을 다시금 끄집어냈다. 이 정답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에만 놔둘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야겠다. 충고를 일삼으며 남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삼가자. 조언이라면 모르되 충고는 이제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