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10시간이 걸렸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의 호스텔에서 나온 게 오전 7시였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거리 라야 기껏 300킬로미터 남짓인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어쩐지 호스텔에서 나오자마자 버스가 나를 태우러 와 있는 게 신기하다 싶었다. 알고 봤더니 사라예보행 미니버스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예약한 모든 승객을 위해 집집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태우고 있었다. 하필 버스에 제일 먼저 올라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베오그라드 시내와 외곽을 한참 뺑뺑 돌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출발한 버스가 이제는 달리는가 싶었는데 산을 끼고 난 도로는 좁고 꼬불꼬불해서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버스 안에서 나는 사람과 짐짝에 끼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오금도 제대로 펴지 못했었다. 그나마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휴게 식당의 풍광이 멋있어서 이 장거리 여행의 의미를 한 가닥이나마 건질 수 있었다. 사라예보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그냥 드러눕고만 싶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승객을 태웠던 버스는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고서 이번에도 가가호호 방문하며 승객을 일일이 내려주고 있었다. 버스는 다시 사라예보를 뺑뺑 돌기 시작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 '호스텔 빌'은 구시가지 중심에서도 언덕을 따라 한참 올라간 곳에 자리했다. 다행히 계속 친절한 버스기사 아저씨는 버스로 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언덕을 올라가 주었다. 덕분에 나는 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배낭을 짊어지고서 많이 걷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묵을 호스텔은 3층짜리 주택 한 채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 앞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니 체크인을 담당하는 20대 중반의 남성이 나타났다. 안경을 낀 남성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보였는데 역시나 영어가 유창했다. 직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호스텔 주인이었다. 엄마와 아들이 호스텔을 운영한다더니, 이 아들이 바로 그 아들이었다.
주인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침착한 태도로 호스텔 구석구석을 꼼꼼히 안내해 주었다. 1층 현관 앞엔 리셉션 데스크가 있었고, 2층에는 식당, 다이닝 룸 겸 거실이 있었다. 객실은 3층에 위치했다. 구조 때문인지 호스텔이 아니라 일반 가정집을 방문한 기분이었다. 내가 묵을 도미토리는 6인실이었는데 방이 널찍해서 다른 여행객과 딱히 엮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볕이 잘 드는 데다 창문이 있어 환기도 되고 거기다 에어컨까지 있었다. 게다가 욕실은 또 어찌나 넓은지, 도미토리룸보다 넓은 욕실에는 월풀까지 있었다. 다이닝룸 겸 거실에는 가운데 기다랗고 고급스러운 테이블이 멋들어지게 놓여 있었고 심지어 tv, 오디오, 게임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내 마음에 쏙 든 곳은 주방이었다. 고급형 양문 냉장고에다 가정집 수준으로 관리된 취사도구 그리고 고급 식기가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기본 조미료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여기가 바로 나의 먹거리 천국을 실현할 곳이로구나 싶었다.
호스텔을 예약하기 전에는 위치 때문에 망설였었는데 실제로 호스텔을 둘러보자 나는 그만 홀딱 반해 버렸다. 여기서라면 얼마든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배낭에 딸려온 식재료를 꺼내 가볍게 뭐라도 만들어 먹을까 싶어 주방에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대뜸 질문이 훅하고 들어왔다.
"헬로! 막 도착했나 보구나. 어떤 차 만들어줄까?"
주방에는 키 큰 젊은 청년 하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 호홍차"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선 온화한 표정으로 차를 만들고 있는 청년을 나는 물끄러미 관찰했다. 키는 190센티미터에 육박할 만큼 컸고 마른 편이었으며 까만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할리우드 배우 누군가를 닮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타이론이라고 해."
홍차를 건네며 청년은 인사도 건네 왔다. 주방에 나란히 서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자니, 따뜻하고 적당히 달달한 차 맛 덕분에 하루의 여독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기분이 묘했다. 으레 안면 있는 사이쯤 되어야 "혹시 차 마실래?" "(생각하고)응 고마워." "(그럼) 어떤 차 마실래?" "(또 생각하고) 난 커피"하는 게 일반적인 대화 패턴이지 않은가? 이 청년은 달랐다. 다정하고 몰랑몰랑한 웃음을 지으며 생전 처음 만난 이에게, 마치 오래전 약속이라도 해둔 것처럼 다짜고짜 무슨 차를 마시겠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타이론은 호주에서 해양과학자로 일하던 29세 청년으로, 호주를 떠나 5개월째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도시가 마음에 들면 한 달씩 머물기도 한다면서 현재 사라예보에만 수 주째 머무는 중이었다. 타이론은 사라예보에서 놓쳐서는 안 될, 기가 막힌 야경 감상 포인트를 소개하며 지도에다 표시해 주었다. 야경을 제대로 보려면 6시 30분까지는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서둘러 요기를 하고 시내를 한 바퀴 휘돌아 구경한 뒤 타이론이 알려준 언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언덕엔 비록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지만, 딱히 이를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여행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타이론은 이미 명당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다른 여행자들과 맥주를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헤이 왔어?"
타이론은 반갑게 인사하며 나에게도 맥주를 따라 주었다. 일련의 행위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는 맥주를 맡겨두기라도 한 줄 착각할 뻔했다. 타이론을 중심으로 여행자들 사이에 인사가 오고 갔다. 이들은 매일 여기서 만나는 사이들처럼 서로 친근해 보였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피곤도 잊은 채 덩달아 나의 기분도 유쾌해지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러하지만 많은 장기 여행자들이 자칫 인색해지기 쉬웠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니 자연스레 자신 이외에는 남을 잘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또 나라별 문화 차이도 있어서 여행자들 간에 자신의 것을 다른 여행자와 나누는 건 참 쉬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나는 다른 여행자와 부딪치는 것 자체를 성가시게 느끼곤 했다. 피곤하다 싶을 땐 입을 꾹 다문 채 냉담한 표정을 하고선 다른 여행자를 경계했다. 아무리 넓은 세상을 돌아다닐지라도 마음에 벽이 있는 한 세상과 사람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법이었다. 사라예보에 닿을 때까지 내 상태가 딱 이랬다. '나를 건들지 마라, 나도 너희를 건들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내가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가장 마음이 좁아져 있을 때, 바로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먹을 것을 강권한 초면의 여행자가 바로 타이론이었다. 마실래 말래도 아니고 대뜸 "뭐 만들어 줄까"라니, 전혀 기대치 않은 호의를 받고서 내 마음의 단단한 철벽이 무장해제되는 듯했다.
생각이 많고 말도 많고 또 그만큼 오해도 많은 시대인지라 괜히 주고도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달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주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턱 하고 내어 놓은 친절함과 다정함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나는 타이론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다른 여행자에게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친절을 베풀 마음의 여유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라예보에서 타이론과 마주쳤던 장면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친절의 대명사 이미지로 남았다.
그나저나 탁 트인 시야를 가진 언덕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 옆에 앉아 있노라니, 분홍빛 햇살을 받은 인근 공동묘지 비석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사라예보의 첫째 날 저녁이었다.
사실 사라예보에 오기 전, 2005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The land of My Dreams)'를 비롯한 보스니아 내전 관련 기록이나 영상을 찾아보았었다. 내전을 끝낸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이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도시.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미디어를 통해 전쟁 장면을 봤던 때를 잊지 못했다. 어느 날 TV에서 "걸프전쟁이 발발했습니다"라며 이란, 이라크, 미국이란 나라가 등장했다. 급박한 사이렌 소리 뒤로 전투기가 뜨고 포탄이 쏟아지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뛰어다녔다. '이 세상에 아직도 전쟁이 있다니.' 꼬마였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1953년 6.25 전쟁을 끝으로 지구 상에서 전쟁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 최초의 전쟁 기억인 걸프전이 벌어진 바로 이듬해, 산골마을에 살던 꼬마가 알 턱이 없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나라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전쟁은 3년 9개월간 지속되었다. 1994년 벌어진 르완다 내전도 그렇고 멀리 갈 것도 없이 6.25 전쟁만 하더라도 한민족 간에 벌어진 내전이었다. 내전이 참혹한 건 멀리 있는 적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음식을 나눠 먹고 품앗이를 하던 사이좋은 이웃이 돌변해 나와 가족을 죽이려 드는 것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참혹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내전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 돌아다니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도시마다 각각의 느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론리플래닛도 세계테마기행도 알려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직접 가서 오감을 동원하고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 두발로 고된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집을 개조한 호스텔 덕분에 사라예보에 머무는 동안 마치 친척 집을 방문한 것 같은 편안함과 포근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호스텔을 나서면 별다른 것 없이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다가 깜깜해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유럽의 여름휴가 시즌도 거의 끝이 나서인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차츰 뜸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구도심 골목골목엔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해서 늘 떠들썩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서 구도심의 특색 있는 가게 앞을 서성대고 전통 공예품들을 구경했다. 희한하게도 매일 보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구도심에는 이슬람사원인 모스크도 있었는데, 날이 더우면 수돗가 사람들 틈에 끼여서 손도 씻고 발도 씻으며 쉬어 갔다. 근처에는 정교회 성당도 자리하고 있어서 이슬람과 가톨릭의 앙상블을 볼 수 있었다. 사라예보는 유럽 문화권에 속해 있었지만 이슬람 종교의 영향 때문인지 동양적인 차분함과 고요함을 주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서양과 동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로운 도시였다.
나는 때로 꽤 멀리 떨어진 신도심에 나가 사라예보의 모던함을 감상하기도 하고, 또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곳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사라예보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고, 또 하루의 시작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전의 상처 때문에 우울할 줄로만 알았던 도시 사라예보, 그러나 내가 직접 경험한 사라예보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도시는 아기자기했고 따스했고 정겨웠다. 구도심에는 언덕이 많았는데 그 언덕을 따라 주황색 지붕을 이고 있는 키 작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언덕 어디에 서 있건 해가 뜨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밝았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비록 보스니아는 내로라할 유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자연경관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풍요로운 나라도 아니었다. 정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비극적인 역사의 상처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사라예보의 거리를 걷다 보면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는 건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여전히 민족, 종교 간 갈등의 씨앗이 남아 있었다. 분열에 발목 잡힌 보스니아 정부의 현주소를 보여주듯, 아직 전쟁 복구도 경제 발전 속도도 더디기만 하다. 내가 묵었던 호스텔의 젊은 남자 주인은 보스니아의 현실을 침착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구슬프게 토로했다.
"보스니아에는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몰라요. 사람들은 항상 불안하고 두려워해요. 만약 할 수 있다면 우리도 떠나고 싶지요."
이런 멋진 호스텔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나는 벌써부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사라예보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숱한 여행지를 다니면서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따스한 햇볕을 쐬며 카페에 앉아 있다가 심심해지면 또 거리를 한껏 쏘다니고 싶었다. 사라예보에서라면 집 떠나 지친 심신에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정상 사라예보에 열흘밖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던 게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졌었다. 다른 곳을 여행하고 있어도 자꾸만 사라예보가 생각나서 마치 헤어진 연인처럼 한동안 마음에 담아 두어야 했다. 슬픔을 간직했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던 사라예보, 그 낮게 가라앉은 조심스러운 도시는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고 자꾸만 돌아오라고 여행자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